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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뉴스뉴스데스크

송고의 길 막혔지만..업도 목숨도 걸었다

(앵커)
42년 전 오늘도 광주에선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의 진압에 피흘리고 있었습니다.

앞서 전해드렸던 것처럼
당시에는 이런 소식들이
신문과 방송에 실리지 못 했는데요.

결과적으론 보도되지 못 했지만
여러 위험을 무릅쓰며 기록을 남기려 한
언론인들이 존재했습니다.

광주MBC 연속 기획 보도
미완의 오월 수첩 이다현 기자입니다.

(기자)
10.26 사건, 12.12 사태가 발생한
1979년 이후 모든 언론 기관은
계엄하에서 사전 검열을 받아야 했습니다.

1980년 5월 무렵
각 신문과 방송사들은 잇따라 양심선언을 하며
검열에 항의하는 입장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 서공석 / 5.18 당시 광주MBC 기자
"방송국에서 전부 기자들이 올라왔는데 지방에서도.
한 사십 명 정도가 모였어요. 5월 16일 날 오후 7시에."

* 노병유 /5.18 당시 광주CBS 기자
"내용은 비상계엄 철폐하라. 전두환이 물러가라. 또 언론 자유 보장하라."

5월 16일, 기자협회 차원에서도
검열반대와 제작거부를 결의했습니다.

오는 20일부터는
검열을 받지 않겠다는 보이콧이었는데,
이를 주도한 기자협회 수뇌부들은
포고령 위반을 이유로 붙잡혀 고문을 당했습니다.

* 노향기 / 5.18 당시 기자협회 부회장
"고문이 뭐 이어지는데 고춧가루 고문도 하고.
칠성판 고문을 하는데.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고문할 때 꼭 끼는 거지.
이런데 이렇게 하면 안 좋아 지금도."

크고 작은 반발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 나의갑 / 5.18 당시 전남일보 기자
"보도 검열관들하고 '뭐 이런 것까지 삭제를 하느냐' 말다툼을 많이 벌입니다."

그리고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총알이 날아드는 가운데서도
누군가는 취재 현장을 지켰습니다.

시민이 군인의 곤봉에 얻어맞고
계엄군이 거리를 가득 메운 사진 등은
그렇게 역사적 기록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  나경택 / 5.18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
"군용 헬기가 와서 저희들한테 총을 겨냥하는 거예요.
광주 역사는 내가 기록했다는 그 자부심 그 마음을 갖고
일했기 때문에 그 무서운 것이 별로 안 보이더라고요."

전남매일 기자들은
취재를 아무리 해도 신문에 싣지는 못하자
'검열 없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다른 인쇄소를 찾아나섰습니다.

그 시도도 좌절되자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며
집단 사직서를 냈습니다.

5.18이 끝난 후에도 어떻게든
참상을 알리려 한 노력은 이어졌습니다.

월간전매 6, 7월 합본호에는
'반민족', '반민주'라는 단어로
신군부의 만행을 표현한 편집후기가 실렸습니다.

검열의 허점을 비집고 내보낼 수 있었던 원고였습니다.

* 김연두 /5.18 당시 전남매일 기자
"전체를 다 읽어봤어야 했는데 아마 편집후기에
이런 말이 써있으리라고는 그 사람들(검열관)도 생각을 못해버렸던 것 같아요.
그로 인해가지고 저는 사표를 세번을 썼었고
제 선배들 두 분들도 사직을 했어야 됐었습니다."

8월호 표지엔
5.18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피로 물든 붉은 무등산 그림을 실었지만
이는 월간지 폐간의 계기가 됐습니다.

기존 언론이 기능을 못하자
윤상원 열사와 들불야학의 투사회보 등
대안언론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 나경택 / 5.18 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
"매년 5월만 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한 줄도 못 쓴 기자들이 전부 죄인 아닙니까.
5.18 영령들한테 사죄를 하고 '정말로 잘못했습니다'하고 빌고"

언론을 지키려는 노력은
결과적으론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언론은 1987년 6월 항쟁이 있기까지
억압과 굴종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언론의 입이 막히면서 민주주의는
그만큼 늦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MBC뉴스 이다현입니다. 
이다현
광주MBC 취재기자
시사보도본부 뉴스팀 사회*교육 담당

"안녕하세요. 이다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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