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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뉴스뉴스데스크

군부에 꺾인 펜..'미완의 취재'

(앵커)
42년 전 오늘은 1980년 5월 17일로
전국에 비상계엄이 확대된 날입니다.

신군부는 언론의 입은 더 틀어막았고
지역 언론은 이후 이어진 열흘 간의 참상
5.18 민주화운동을
제때 알리지조차 못했습니다.

5.18 42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과 언론을 주제로
광주MBC가 기획한 연속 보도
이다현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연기와 불길로 거리가 아수라장입니다.

돌멩이를 던지며 시위하는 시민에게
군인이 곤봉을 휘두릅니다.

군부의 총칼에 국민이 죽어나가면서
시내 곳곳엔 시신도,
태극기를 두른 관도 늘어갔습니다.

42년 전 5월, 광주의 모습입니다.

이 민주화운동의 현장에 언론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들이 쓴 취재수첩입니다.

'1980년 5월 18일.
새벽에 공수부대 학교 진주.
여학생 짓밟히고 페퍼포그와 몽둥이 구타가 심했음.'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서 2시.
최미애. 유탄으로 두부 관통상. '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이어진
항쟁의 역사는 당시 언론인들의
수첩에도 기억에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 조광흠 /5.18 당시 조선일보 광주 주재기자
"난사가 시작된 거예요. 그냥 '당당당당'하니까 나도 이제 겁이 나고.
그 전일빌딩 앞에 있던 거기 사람들이 그때 집단 발포를 해서 많이 죽었죠."

하지만 오월 기자들의 취재는
보도로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신군부의 검열 때문이었습니다.

* 박진우 /5.18기념재단 연구실장
"1980년 3월경부터 이미 신군부에서는 언론에 대한 비상조치를 내렸고,
특히 강화됐던 것은 1980년 5월 17일부로 기해서 포고령이 내려지는데
그 내용 중에 하나가 언론에 대한 부분입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
언론검열관실을 두고
모든 기사를 일일이 살펴보며
보도를 해도 될지 말지 직접 결정했습니다.

신문과 방송.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검열은 분야를 따지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섬 마을 생활상을 그린 라디오 원고에
페이지마다 찍힌 '검토필' 도장도 그 흔적입니다.

* 김종일 /5.18 당시 VOC 전일방송 기자
"저희들이 원고를 쓰면 가서 계엄분소에 가서 검토를 받고,
거기서 검토필 도장을 찍어 놓은 것으로 방송을 하게 되는 거죠."

5.18 참상을 알리려 쓴
지역신문 기사 지면은
삭제를 지시하는 빨간색 표시로 가득합니다.

계엄군의 검열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이 발생하기 5개월 전쯤
광주MBC 직원 3명은
방송 불가 판정을 받은 기사를
실수로 보도했다가 505보안부대에 끌려가
그 중 1명이 4박 5일간 고문을 당했습니다.

뉴스 원고지를 인수인계하는 과정에
착오가 있었던 건데,
기사 내용 자체보다도 지침을 어겼다는 점이
문제가 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반공연맹지부에 전시돼 있던 소련제 권총을
누군가 훔쳐갔다는 사건 기사로,
다른 신문사가 먼저 다뤘던 내용이었습니다.

* 박보융 / 5.18 당시 광주MBC 편성제작 책임자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바라보는 데서 "세 사람 나와." 해가지고,
지프차로 태워서 연행을 해갔어요.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최초로 1호 포고령 위반 사건으로 됐거든요.
벌거벗은 그 우리 심 차장 몸에다 물 뿌리고 그러니까
얼마나 추웠겠습니까. 그 겨울철에, 1월에."

시말서를 쓰게 하거나
오리걸음을 시켜 모욕을 주는 등
언론인 길들이기도 반복됐습니다.

* 나의갑 / 5.18 당시 전남일보 기자
""열두시 안에 신문이 발행돼야 합니다." 그랬더니 거기서 오리걸음을 시키잖아요.
상무대 정훈실에서 보도 검열단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거기까지 약 한 1.5km."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광주의 상황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고
광주는 더욱 고립됐습니다.

권력에 대한 견제, 그리고 진실 보도.

언론이 제 역할을 했더라면
5.18 희생자들의 고통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을 거란 지적이 나옵니다.

MBC뉴스 이다현입니다.
이다현
광주MBC 취재기자
시사보도본부 뉴스팀 사회*교육 담당

"안녕하세요. 이다현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