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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중국도 외면..고립됐던 광주의 5.18

◀ANC▶

오늘은(21) 80년 5.18 당시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로
수많은 시민들이 숨졌던 날입니다.

그동안 널리 알려졌던 건
5.18 당시 미국이
신군부의 무력진압을
사실상 묵인했다는
이른바 '미국의 책임론'이었는데요.

집단발포 직후
중국 측의 움직임까지 살펴보면
당시 열강들에 의해
철저하게 고립됐던 광주의 상황이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김인정 기자입니다.

◀VCR▶

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이
계엄군의 총에 맞은
광주시민들의 피로 물든 다음날,
미국 국무부의 아태 차관보 홀부르크는
중국대사 차이를 국무부에 부릅니다.

(돌출c.g)대화의 내용은 중국에게
북한이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해달라는
미국 측의 요청이었습니다.

이날은 미국이 광주 상황에 대해
백악관 최고위급 정책검토회의를 열고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유혈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 날이기도 합니다.

(c.g)나흘 뒤인 5월 26일,
중국은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 사설을 통해
미국이 한국 신군부가 시민을 억압한는 걸
방조했다면서도, 미국이 광주 문제에 대해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도록 촉구했다며
비판 아닌 비판을 했습니다.

(c.g)
이어 28일, 일본을 방문한 중국 지도자가
"북한이 지금의 혼란을 이용해
남한으로 가는 일은 없다"고 밝히며
미국과의 긴밀한 협조에 정점을 찍습니다.

미국이 신군부의 유혈진압을 지지하는 동시에
중국에게도 협조 요청을 했고,
중국 역시 미국의 움직임을 사실상 방관하며
북한을 단속하고,
대북 영향력을 재확인하는데만 신경쓴 겁니다.

◀INT▶
설갑수/ '넘어넘어' 영문판 번역자
"중국조차도 5.18 민중들의 항쟁에 대해 굉장히 무관심했고, 자기네들의 장기적 목적을 위해 그 사태가 빨리 수습되길 원했던 거죠."

이러한 당시 열강의 상황들을 살펴보면
최근 전두환 회고록에 등장하기도 하는
북한군 침투설은 국제 역학상으로 볼 때
불가능했다는 점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5.18에서 가장 비극적 장면 중 하나인
전남도청 앞 유혈사태 뒤.

안보와 질서만을 최우선으로 두고
긴밀히 협조한 열강들의 움직임 아래
광주는 국제적으로도 고립된 섬이었습니다.

MBC뉴스 김인정입니다.

◀END▶
광주MBC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