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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 그들의 광주, 우리의 광주2 - 김종태 편

(앵커)
5.18 항쟁이 한국 역사에서 민주주의의 등대와 같은 자리를 맡게 된 데는 5.18이 끝난 이후 이어진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주MBC는 그 희생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오늘은 부산 출신의 노동자로 광주시민들의 넋을 위로하며 삶을 마감한 故 김종태씨의 죽음을 생각해봅니다.

김철원 기자입니다.

(기자)

5.18이 끝난지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던 1980년 6월 초.

경기도 성남시의 한 교회에서 광주를 탈출한 이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가 계엄당국의 눈을 피해 몰래 마련됐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부산 출신의 노동자 김종태씨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자국민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증언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윤기현/1980년 주민교회에서 5.18 증언
"어떻게 한국 군인이 국민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죽일 수 있고 그렇게 악하게 행동할 수 있냐. 이것은 (당신의 증언은) 다 날조된 것이다. 이걸 선동해서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러느냐고 (저한테 항의하더라고요.)"

결국 광주에 직접 와서 증언이 사실임을 알게 된 김종태씨.

서울로 돌아와 광주 학살의 진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듭니다.

'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뿌렸지만 김씨의 주장을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터뷰)김종수/故 김종태씨 동생
"종태형이 매일 5.18 유인물을 만들었어요. 매일 유인물을 만들어가지고 직접 쓴 유인물이죠. 등사기 있는 데 가서 밤을 새워서 등사기를 이용해서 그걸 종로서적 이런 데 가서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에다가 유인물을 계속 혼자서 뿌리고 다니다가..."

결국 광주항쟁이 끝난 지 13일만인 6월 9일,
분신을 결행하기에 이릅니다.

(스탠드업)
노동자 김종태 씨가 분신했던 장소로 추정되는 이화여대앞 큰길가입니다. 당시 김씨는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뒤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이곳에서 쓰러졌습니다.

<故 김종태씨 약력>

무모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죽음은 그러나 광주학살과 광주시민들의 뜻을 알리는 기폭제가 됐습니다.

(인터뷰)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부평, 평택, 안산, 인천 노동자들이 많습니다. 노동자들이 많이 와서 김종태씨 추모회 참석했고 성남 시민들이 왔고 교회쪽에서 오고 해서 주민교회가 발딛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넘치게 추모회를 해왔습니다."

노동자로 일하며 야학을 통해 사회를 바꾸고 싶어했던 김종태씨.

'내 작은 몸뚱이를 불질러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다'던 청년의 인생은 스물 두해로 끝나고 말았지만

자신의 몸을 태워서라도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뜻은 36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故 김종태씨 약력
-1958년 부산 출생
-1973년 서울 삼진특수철 입사
-1980년 6월 9일 분신, 13일 운명
-1991년 제2회 5.18 시민상 공동수상
-1999년 5.18 국립묘지 안장

내일 이시각엔 "전두환 물러나라" 김태훈씨 편
을 보도합니다.

포털 사이트 <스토리 펀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ANC▶
◀END▶
◀VCR▶
김철원
광주MBC 보도본부 취재기자
보도본부장

"힘있는 자에게 엄정하게 힘없는 이에게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