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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스페셜[한걸음 더] 집중취재

영화 '1987'과 광주2 - 광주와 1987, 그 특별한 인연

◀ANC▶

그렇다면 광주에서
영화 '1987'이
이렇게 특별한 이유는 뭘까요?

87년 6월 항쟁 당시에도
광주 시민들의 활동은
중요한 기폭제가 됐는데요..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던 광주에겐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김인정 기자입니다.

◀VCR▶

푸른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머리를 미는 한 여학생.

전국에서 처음이었던 전남대 여학생의 삭발은
광주 학생들에게 투쟁의
뜨거운 기폭제가 됐습니다.

◀INT▶
박춘애/ 당시 전남대학교 총여학생회장
"거의 30여명에 가까운 친구들이 나와서 삭발을 했고, 어떤 학우들은 직접 거기서 자기 손을 베어서 흰 광목에다 혈서를 쓰고 하면서 분위기가 아주 뜨겁게 올라왔죠."

'우리도 한열이처럼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
몸을 다쳐가며 화염병을 던졌던 건
5월 광주를 알고도 모른 척 할 순 없는,
광주 시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INT▶
조오섭/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
"80년 5월에 대한 비디오를 보게 됐고 80년 5월에 대한민국 군인이 광주시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는 그냥 강의실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순 없었죠."

광주사람들을 희생시킨 군부독재정권의
4.13 호헌선언에 경악한 광주는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곳이기도 했습니다.

87년 4월,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무기한 단식농성에서 출발한 광주의 투쟁은,

6월 항쟁의 주역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발족시키며
정점을 찍었습니다.

◀INT▶
김상집 / 당시 국민운동전남본부 재정국장
"이게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드디어 부산이라든가 전주, 대전, 춘천,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니까 결국 서울도 5월 27일날 국본이 출범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5월로 인해 깨어났지만
7년의 억눌림 속에 살아갔던 광주는
5.18이 전국으로 확장되는 순간을
어떤 지역보다 각별하게 지켜봤습니다.

◀INT▶
조선호/당시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연합회 활동
"(5.18 당시)도청으로 들어가신 선배님들, 그 정신, 그리고 그걸 알려야 한다는 것들 속에서 많은 분들이 분신과 투신을 하시죠. 그런 것들이 (6월 항쟁까지) 쌓였던 거고.."

시민 모두가 주역이었던 6월 항쟁.

광주 시민들은 5.18 당시 그 때처럼
민주주의의 횃불을 높이 들고 있었습니다.

MBC뉴스 김인정입니다.

◀END▶
김인정
광주MBC 취재기자
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