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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라디오칼럼_기념의 조건_국립중앙박물관 박중환 학예관_20181004
■ 기획 김민호
■ 연출 황동현
■ 진행 김두식
■ 국립중앙박물관 박중환 학예관
■ 기념의 조건
조선 효종때인 1653년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 사람이 있었습니다. 헨드릭 하멜입니다. 하멜 일행은 뭍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제주도의 관헌에게 체포되어 무려 13년 동안이나 조선 땅에 억류되었습니다. 그들은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고 10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에게 돌아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비밀리에 요청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할 뻔 하기도 했습니다. 엄격한 감시 속에 노동을 하면서 힘든 억류 생활을 했는데, 그들은 흉년이 들면 구걸을 해서 끼니를 때워야 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태형으로 곤장을 맞았습니다. 모진 풍상의 세월이었습니다.
하멜은 나중에 전라도 여수 좌수영에 배치되어 억류생활을 하다가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하여 1668년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갑니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간 그는 자신의 회사인 동인도 회사에 그동안 밀린 임금을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서 그 증거자료로서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보고서 형식으로 글로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표류기가 책으로 출판되면서 그는 뜻하지 않게 조선을 유럽에 알리는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하멜표류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하멜 기념비라거나 전시관, 그리고 하멜 기념관과 같은 시설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멜이 조선 사회에 대해 가졌던 기억과 경험 그리고 표류기를 쓰게 된 동기 등을 돌아보면 그를 기억하는 시설의 이름으로 ‘기념’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아보입니다. 기념이란 그 인물이 우리 사회에 대한 우호적 동기를 바탕으로 이룬 공적을 전제한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표류해 온 사람들을 그토록 가혹하게 대했던 우리가 이제 와서 그를 기념한다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하멜에게 있어서 조선이란 감옥과도 같은 쓰라린 땅이었습니다. 자칫 하멜 기념관은 우리를 증오했던 기억을 기념하는 이상한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기념관’이라는 이름이 아닌 ‘자료관’이나 ‘전시관’같은 이름도 있습니다. 잘못 쓰여진 언어가 우리 사회의 품격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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