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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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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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라디오칼럼_20180619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30~08:57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이화경 소설가

■ 앵두기일과 문학

앵두꽃이 피고 지고, 꽃 핀 자리에 앵두 열매가 열리고 있는 계절입니다. 빨갛고 앙증맞게 생긴 앵두가 열리던
화양연화의 시절에 죽어버린 소설가를 기리는 날을 일컬어 오우토기(櫻桃忌), 즉 앵두기일이라고 합니다.
생전에 소설가는 ‘여름 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름에 죽는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여름 꽃과 죽음이라는 단어 사이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지만, 소설가는 희고 환한 여름 꽃에서 저승으로 가고픈 죽음 충동을 어찌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삶과 죽음은 한통속이고, 흰 꽃과 흰 눈은 찰나에 사라지기에 허무한 걸로 치자면 매한가지였음을 소설가는 알았던
모양이지요. 지레짐작의 문장을 쓰는 이유는 그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수록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점점 더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을 절감합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처음으로 그의 소설을 접하면서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배척당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인간 실존이 살기 위해 선택한 멜랑콜리와 자멸적인 도취가 명징하고 탐미적인 언어로 조율된 소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저처럼 그의 작품과 생애에 매료된 독자들이 많았던지, 앵두기일이 다가오면 그의 묘가 있는 도쿄(東京)에 있는 선림사엔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일 뿐만 아니라 거의 매일 그의 묘엔 추모객들이 바치는 꽃과 술과 향과 담배로 넘쳐난다고 합니다.
느닷없이 이국의 소설가 기일을 꺼내 놓는 이유는 주말에 절 근처에 위치한 어느 문학관을 갔다 온 소회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생전에 시 창작을 당대의 현실에 대한 윤리적 책무로 삼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응전을 시적 전략으로 삼았던 시인의 문학관은 호젓하고 소슬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전시된 낡은 시집을 보면서 시인의 격정적인 비관주의와 낭만적인 우울, 청년 특유의 고통스런 내면의 과잉 표출, 부정하고픈 현실에 대한 비장미와 단호한 투쟁 의지가 정직한 언어에 실렸던 시 작품들을 읽으며 밤 샜던 저의 이십 대가 떠올랐습니다. 문학관을 찬찬히 돌아보고 시인의 친필 원고며 사진과 저서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에도 뒤이어 찾아든 방문객들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문학관 전시실에서 단순 관람을 위해 전시된 자료들은 여타의 문학관들과 별반 차이는 없었습니다. 스펙터클한 비주얼에 시선을 뺏기는 시대적 상황에 문학관의 전시물들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게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왕 문학관을 건립한 마당에 찾는 이들에게 전시물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잠시 고민해봤습니다. 이국의 작가와 이 땅의 작가가 사후에 받는 사랑과 대접이 현격한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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