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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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6월 05일/ 이화경/ 잊지 않는 마음

이화경 소설가
- 잊지 않는 마음

며칠 전에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봤습니다. 고등학교 철학 교사인 중년의 주인공이 맞이하게 된 인생의 곤궁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였습니다. 요양원으로 들어갔던 엄마는 예상치 못하게 빨리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젊은 날에 만나 이십여 년 넘게 함께 살았던 같은 철학 교사였던 남편은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고, 그녀의 요구에 따라 별거를 합니다. 딸과 아들은 이십 대에 접어들자마자 독립합니다.
그녀를 붙들어 주었던, 혹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붙들었던 친애하는 존재들은 죽거나 떠나거나 독립합니다. 드디어 평생 철학을 부여잡았던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온전한 주체, 자유로운 개별자가 되었으니, 환호작약해야 마땅하겠지요.
하지만 인생도 마음도 그리 간단치 않나봅니다. 그녀가 쓸쓸하고 외롭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까요. 자존심 강한 그녀는 아무에게도 아프고 슬픈 속내를 털어내지도, 다시는 어떤 사랑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저릿한 쓸쓸함도 드러내지 않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어떤 문장이 그녀를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의 어떤 글이 그녀를 견디게 해줄 수 있을까요. 파스칼과 플라톤의 무엇이 그녀를 지탱할 수 있게 해줄까요.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시간에, 혼자 웁니다. 울다가 철학책을 붙듭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들은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이고, 배신이고, 작별입니다.
영화 후반부에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딸이 낳은 갓난아기입니다. 할머니가 된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고 어르면서, 나직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맑은 샘물가를
나 거닐다가
그 고운 물속에
내 몸을 담갔네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참나무 숲 아래에서
내 몸을 말렸네
가장 높은 가지에서
꾀꼬리는 노래했지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꾀꼬리야 노래하렴
즐거운 마음을 가진 너
네 마음은 웃음 짓고
내 마음은 눈물짓네
오래전 사랑했던 당신을
나는 잊지 않으리
나는 연인을 잃었다네
그럴 일도 아니었네

그녀는 잠결에 깨어 투레질을 하는 갓난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노래합니다.
연인을 잃었다고, 그럴 일도 아니었는데 그리 되었노라고, 인생이란 맑은 샘물가를 만나 고운 몸을 담그고, 참나무 숲의 가장 높은 가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꾀꼬리가 되었다가, 연인을 잃게 되어 사랑은 오래 전 일이 되었노라고, 이제는 눈물짓는 마음이 되어 웃는 네 마음을 슬프게도 다 이해하게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가 끝난 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건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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