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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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 23일/ 이화경/ 허기에서 올린 고백의 언어

이화경 소설가

- 책 한 권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젊은 페미니스트가 된 소설가이자 대학 교수인 그녀의 글에 반해 동영상까지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영상 속의 그녀를 보면서 저는 솔직히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그녀는 거대한 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녀는 무시무시하게 살을 찌웠을까요?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을 위반하는 것만 같은 몸집의 거대함에 대해 묘한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그건 제 자신의 고루한 편견이고 위험한 선입견임에 틀림없습니다.
얼마 전에 반갑게도 그녀의 새 책이 나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은 저의 궁금증을 마치 눈치 챈 것처럼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무거웠던 때의 몸무게부터 밝히면서 시작했습니다. 키 190센티미터에 241킬로그램이 나갔던, 그녀의 표현을 따르면, ‘어떻게 그 지경까지 되도록 내버려두었는지’에 대한 고백은 이어졌습니다. 그녀가 뒤룩뒤룩 살이 찌도록 먹고 또 먹어대면서 초고도 비만의 몸을 만들어야만 했던 고통의 원인을 읽는 순간, 충격과 슬픔으로 멍해지고 말았습니다.
착한 딸이자 모범생인 열두 살의 흑인 소녀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백인 소년과 그의 친구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후에 그녀는 몸을 바꾸기 위해 먹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는 뚱뚱해지고 무거워진 몸을 가지게 되면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끔찍한 상처와 고통으로부터 가능한 멀어질 수 있으리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알아버렸기에 음식을 몸에 쟁이고 가두고 삼켜댔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어린 소녀 안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음식을 먹어댔습니다. 책을 읽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가장 사랑했던 명민하고 예민한 소녀는 숲속에서의 가학적이고 굴욕적인 성폭행에 대해 ‘싫어’라고 했던 자신의 거부가 철저히 무시당했던 경험을 언어화 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폭식증과 거식증에 묶여 있는 몸과 자유를 꿈꾸는 이성 사이의 불화와 화해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고백의 언어들은 분명 그녀의 지독한 허기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은 상처의 흉터를 걷어내지 못하고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잔인한 세상에서 모진 세월을 겪은 우리 모두 크고 작은 흉터들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요. 자신만 아는 상처와 끝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할 흉터를 통해 우리는 타인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인생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지 않던가요. 심장을 펼쳐 보인 고백록을 써준 그녀 덕분에 오랜만에 제 허기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록산 게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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