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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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07일/ 박중환/ 이름에 담긴 영혼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

- 오랫만에 세종시를 방문했습니다. 오송역에서 세종시로 가는 버스를 찾으면서 늘 외우기 어려웠던 그 버스의 이름, ‘BTR’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정류장에 가 보니 거기엔 ‘세종시 BRT’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번에도 저는 그 이름을 외우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BRT란 ‘Bus Rapid Transit’의 약칭이라고 나옵니다. 빠르게 버스를 운행시키는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외우기 어려운 이 이름을 굳이 일반 시민들이 사용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런 영어 표기는 해당 분야의 행정 담당자들이 책상에서 기안문서를 작성할 때나 쓰면 될 것이고 일반 시민들은 ‘세종행 급행버스’ 정도의 이름이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곳을 흐르는 ‘미호천’과 같이 아름다운 강의 이름을 버스에 붙여도 좋았을 것입니다.

케이티엑스나 에스알티와 같은 고속철도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떼제베나 이체와 같은 알파벳 이름을 불편없이 쓰고 있는 것은 그들이 라틴문자로 표기된 인도유럽어를 수천년동안 사용해 왔기 때문입니다. 케이티엑스라는 이름은 음절이 다섯이나 되어서 길고 그 속에는 거친 소리를 내는 격음이 두 개나 포함되어 있어 발음도 무척 힘듭니다. 동양권의 다른 나라들은 자기 나라의 전통 언어에 친숙한 이름들이 의미있고 편리할 터입니다. 일본의 고속철도인 신칸센에는 희망이라는 뜻의 노조미, 빛이라는 뜻의 히카리, 그리고 메아리라는 뜻의 코다마라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국제화의 이름을 쓰고 게으름과 무비판의 그늘 속에서 수많은 공공영역의 이름들이 알파벳 부호화 해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언어 사대주의가 겉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말과 글은 사람의 정신과 영혼을 담은 그릇입니다. 이대로라면 민족 문화 최대의 특색이고 자랑인 독자적인 말과 글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됩니다.

철도나 버스 노선들의 이름에 아름다운 우리의 산과 강, 그리고 새와 동물들의 이름이 붙여졌으면 좋겠습니다. 산들바람이라거나 파랑새와 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부르기 쉽고 외우기도 좋은 이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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