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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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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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경 소설가_미투(#Me Too, 나도 말한다) 운동_라디오칼럼_20180306

■ 방송시간 월요일 - 금요일 AM 08:5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3월 6일 화요일
■ 이화경 소설가

■ 미투(#Me Too, 나도 말한다) 운동

◆ 이화경 소설가 -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 Too, 나도 말한다) 운동이 사회 전반에 걸쳐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성 혐오와 여성이 당했던 폭력을 고발한 내용들은 너무도 생생하고 끔찍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런 사태는 여성인 제겐 너무나 익숙해서 절망적이고, 아마도 싸움은 지리멸렬하게 끝날 것 같은 씁쓸한 예감 때문에 미리 암울한 기분마저 듭니다. 여전히 성폭력과 관련된 보도가 터지면 먼저 사실관계부터 따지고 보는 이상한 엄정함과 꼼꼼함이 여성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믿음직한’ 증인이 되지 못한다는 혐의처럼 느껴집니다. 폭력을 당한 고통스런 사건을 공개적으로 토로하기까지 치욕과 분노와 자기비하가 뒤엉킨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다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 관계를 까발리기에 바쁩니다.  고발한 여성들의 품행과 인성과 용모를 시시콜콜하게 트집 잡으면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용기와 발언할 권리와 상처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꺾으려는 2차 가해의 양태는 마치 미투 운동에 대한 후속 매뉴얼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척박한 이 땅에서 이 정도의 성취를 일구어낸 여러 분야의 거물들을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 괴물이 마치 고발한 여성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작가인 리베카 솔닛이 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책에 따르면, 힘없는 여성이 유력한 남성의 경력을 뒤엎은 게 아니라 그 경력을 진즉에 끝장냈어야 마땅한 행동을 이제야 노출시켰다고 말해야 정확한 것입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의 반성문을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 조건절로 시작하더군요. ‘피해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이라는 모호하고 책임 회피적인 문장은 반성문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듭니다. 어떤 폭력이 피해자의 느낌을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자기반성의 기준으로 삼는지요.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가 안 아프다고 ‘느꼈다면’ 가해자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건지요.  얼마 전에 남성 시인을 ‘괴물’로 지칭한 여성 시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잠시 숨을 골랐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전히 제 자신이 다른 사람의 의도와 감정을 헤아리기 위해 생각의 속도를 조절하는 오랜 습관이 남아 있음을 순간 깨닫고 씁쓸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저는 그분에게 미투 운동은 젠더 감수성이 바야흐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발이 추문과 가십으로 소비되는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활짝 열려졌으며 거기엔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제 친구가 말한 것처럼 미투 운동에서 실수는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거겠지요. 실수를 두려워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주저주저하면 한 걸음도 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다만 글을 쓰는 작가 입장에서 무엇보다 평생에 걸쳐 쌓아왔던 여성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성추행 고발로 인해 단박에 사라지고 오로지 성추행 대상자이자 피해자라는 타이틀로만 회자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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