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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양식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80212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2월 12일 월요일
■ 이화경 소설가
■ 세월의 양식
◆ 이화경 소설가 - 눈이 휘날리는 궂은 날씨와 쨍한 햇빛을 좀체 보기 힘든 어두운 풍경 속에 수척해진 나무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가라앉아버리곤 합니다. 입춘에 오히려 더 맹렬하게 추워진 탓에, 겨울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고, 곧 봄이 온다는 말은 새파란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들려오는 소식은 영하의 겨울 온도보다 더 혹독하고 쓰라린 내용들이 주를 이룹니다. 특히 인생의 겨울인 말년에 접어든 예술가들의 추문을 들은 날이 이어지면서 참으로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더 현명해지고, 예술가들이 경력의 말년에 이르러 얻게 되는 독특한 인식과 형식이 과연 존재할까? 라는 질문을 던진 이는 문학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였습니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동양의 이미지가 서구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허상임을 체계적으로 비판한 저서인 ‘오리엔탈리즘’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에드워드 사이드는 50대 후반에 백혈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는 것을 의식했지만 두려워하기 보다는 책을 쓸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백혈병 진단을 받고나서 그는 오히려 가르치고, 여행하고, 강의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등 더욱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특히 그는 예술가들이 말년에 쌓아왔던 공인된 명성에 기대고, 누리고, 이용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노쇠와 죽음을 앞두면서 오히려 의식이 깨어 있고 현재를 대단히 예민하게 인식하면서 이제까지의 명성과 성공과 치열하게 대결하는 예술가들을 다루는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입니다.
그가 다루는 예술가들 가운데 베토벤에 대한 대목이 감동적입니다. “불쌍한 베토벤, 그는 귀가 먹었고, 죽음이 가까워졌어. 그러니 이런 흠은 너그럽게 눈감아줘야 해.”라고 말함으로써 베토벤의 비극적인 말년을 슬쩍 넘어가지 않고 말년의 베토벤이 작곡한 음악의 지속적인 긴장감과 용인될 수 없는 고집과 창의적인 엄격함을 꼼꼼하게 살펴봅니다. 타협하고 화해함으로써 얻게 되는 달콤한 보상들을 멀리 하고, 늙어가지만 정신적으로는 민첩한, 어떤 식의 위안도 거짓 낙관론도 없이, 자신의 시대와 격렬하게 충돌한 예술가로 말년의 베토벤을 자리매김합니다. 자신의 전작과도 화해하지 않았던 베토벤의 말년의 양식은 새로운 시대 예술의 전위적인 전조가 되었음도 밝힙니다.
웨드워드 사이드가 거론하는 예술가들은 비록 나이는 먹었지만 으레 수반되기 마련인 평온함은 필요 없다는 듯이, 사랑스럽게 굴거나 환심을 사려는 생각은 없다는 듯이 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누구도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필멸성을 부인하거나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의 주제로 정직하게 반복적으로 돌아옴으로써 예술의 관습을 철저히 깨부수면서 한계를 넓혀갔습니다. 안이한 구원의 메시지나 화해를 제시하지 않고, 자신들의 필멸과 예술적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내모는 무시무시한 치열성을 말년에 쏟아 붓습니다.
인생의 겨울인 말년에 오히려 눈보라치는 황량한 벌판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서 쌓아올린 경력과 재능과 성공과 발전을 허물고 전례 없는 불온하고 비타협적인 작품을 창조하면서 미적 완성을 이루는 예술가를 제가 사는 이곳에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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