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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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고독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80119

■ 방송시간 월요일 - 금요일 AM 08:5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1월 19일 금요일
■ 이화경 소설가

■ 시대 고독

◆ 이화경 소설가 - 새해엔 신년계획을 많이 세우시는데요. 어떤 꿈과 목표를 세우셨는지요. 제가 아는 지인은 올해엔 반드시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2년 전에 썼다가 묵혀 두었던 초고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목표라고 하더군요.
저 역시 묵은 습관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를 두어야겠기에 목표를 정해보았습니다. 새해에 제가 설정한 목표는 ‘덜어내기’입니다.
연말에 계단을 내려가다 발목을 접질러서 잘 걷지를 못했습니다. 한의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발목부터 시작해서 허리까지, 그동안 묵혀 두었던 몸의 성치 못한 부분을 말씀드렸습니다. 발목은 그렇다치고 허리가 아프다는 저의 말에 촉진을 하던 의사 선생님은 제가 통증을 호소하자, “거긴 허리가 아니고 살이에요, 살. 언제는 허리가 아프시다면서요.” 라고 하시더군요. 약간 무색해진 저는 “아. 예. 예.”하고 무추름하게 대답했습니다. 약간 웃기고 조금 슬퍼졌습니다.
허리가 아픈지 살이 아픈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살았던 지난해를 되돌아보면서. 너무 바쁜 시간의 넘침도, 부산스러운 관계의 잉여도, 감정의 과잉도, 필요하지도 않는데도 쌓아두었던 물건들도 덜어내는 게 필요하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이 풍요로운 가난의 시대에는 나 하나 지키는 것조차 얼마나 지난한 싸움인가’라고 어느 시인은 ‘시대 고독’이라는 시에서 한탄했습니다.
SNS와 이메일 등 셀 수도 없는 타인들과 접속하는 매개체는 너무도 많아졌지만, 정작 마음을 털어놓을 진짜 벗은 없는 풍요로운 가난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멍 때리고, 빈둥거리고, 하릴없이, 그저 가만히 홀로 있는 나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일에 대해선 전의에 불타면서도 정작 허물어지는 자신의 내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인정받으려고 전력질주하면서도 정작 강해지기보다는 더 약해졌고, 밖으로는 전투력 만빵의 자세로 센 척 폼을 잡았지만 번아웃 되어서 텅텅 비어버린 스스로에게 공포감마저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잠을 잘 때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편한 자세로 눕지 못하고 팔짱을 끼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어깨는 돌덩이처럼 굳어지고, 손목은 시큰거리고, 눈꺼풀은 수시로 떨리는 등, 몸이 총체적 날림공사로 지어진 부실한 집 같아도 진통제로 막곤 했던 것도 그만 하려고 합니다.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은 몸도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쌓여 있던 책들은 여러 번에 걸쳐 나눠주고 버렸습니다만, 더 덜어내려 합니다. 여전히 책에 대한 욕심과 미련은 잘 덜어내기 힘들 줄 알지만, 노력해보려 합니다. 무엇보다 내 자신과 싸우지 않고, 화해를 해보려 합니다.
어쩌다 이 나이에 혼자가 서툴게 되어버렸는지, 좀 씁쓸하긴 합니다만, 올해엔 마이클 해리스가 쓴 책 제목처럼,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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