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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_하늘과 바람과 버들과 시_라디오칼럼_20171121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11월 21일 화요일
■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
■ 하늘과 바람과 버들과 시
◆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 - 조선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조선 팔도 사람들에 대한 평을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정도전의 대답에는 흥미로운 표현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경기도 사람들을 거울 속의 미인이라는 뜻의 경중미인이라고 했다거나 강원도 사람들을 가리켜서 바위 밑에 앉아있는 부처님 즉 암하노불이라고 표현했었다는 것이 그러합니다. 이 곳 전라도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했었을까요. 그는 전라도 사람들의 성정을 가리켜 ‘풍전세류’라고 했습니다. ‘미풍에 나부끼는 부드러운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입니다. 불의에 저항하여 분연히 일어서곤 했던 이 지역 사람들에 대한 평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겠으나 다른 지역 사람들이 바라본 이 지역 사람들의 성정에 대한 의견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전통시대에 호남지역은 대체적으로 경학보다 문학과 시가 더 발달했던 지역이었다고 평가됩니다. 부드러우면서도 구성지고 애절하며, 소리의 끝이 길게 이어지는 서편제의 판소리도 이 고장 문화의 한 특색입니다.
부드럽다는 말은 약하다는 말과 다릅니다. 버들가지는 부드럽기에 흩어진 것들을 묶을 수가 있고 충격과 외압에 부러지지 않는 융합력과 강인함을 갖습니다. 현재도 그렇지만 미래의 사회는 모든 것이 바뀔 것입니다. 세대 간의 생각의 차이가 깊어지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역할의 범주가 무너지고, 민족 간의 경계가 옅어지며, AI로 대표되는 기계와 사람 사이에서 정체성이 섞일 것입니다. 가부장적 권위의식이나 전통적인 성 역할이나 민족을 위한 영웅적 활동들에도 그 가치를 두고 의문부호들이 붙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회환경이 변화할 미래에 ‘미풍에 나부끼는 부드러운 버드나무’는 그 가치가 새롭게 평가될 수 있습니다. 권력과 집중과 경직으로부터 발생했던 영향력의 중심이 소통과 교감과 통섭으로 옮겨가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정도전이 나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 한 농부와 나눈 대화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통찰이 경험에서 나온 애정과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풍전세류는 천년의 시간을 기다려 새로운 시대에 비로소 빛을 발할 감성과 소통의 아이콘일 것입니다. 전라도라는 이름이 이제 천년이 되었습니다. 이 땅에서 미당 서정주나 영랑시인과 같은 감성과 언어의 거장들이 배출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 진행자 - 박중환 관장은 전남 지역 유일의 국립 박물관인 국립 나주 박물관의 개관 업무를 총괄했고 현재 지역민들의 역사에 관심을 높이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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