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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보내는 방법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70707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7월 7일 금요일
■ 이화경 소설가
■ 여름을 보내는 방법
◆ 이화경 소설가 - 아주 오래 기다렸던 비가 내렸습니다. 비 덕분에 외출하지 않고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동안 쌓아두었던 책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저는 흥미진진한 스토리 위주의 책보다는 내면을 찬찬히 살피는 책들을 위주로 읽고 있습니다. 글쓴이의 내면의 속살을 잘 드러내는 책은 단연 일기일 텐데요. 일기에 관심이 많아서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일기들을 틈틈이 사두었습니다. 세상에 공개될 것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과 달리 일기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쓰는 솔직한 글이기 때문에 독자로서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뭐랄까요. 꾸밈없는 걸 넘어서서 폭로에 가까운 내밀한 내용들을 읽게 될 때면 묘한 스릴과 죄책감을 동반한 감정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자서전이나 회상록에는 자기과시가 따르지만, 생전에 공개를 의도하지 않고 쓰는 일기는 보다 진실성이 강하기 때문에 훨씬 흥미로운 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언젠가는 죽게 되는 인간 실존의 유한성과 영원할 것 같은 관계와의 슬픈 이별, 자신의 재능에 대한 다함없는 절망과 한계를 토로하는 뜨겁고도 서늘한 글들을 읽으면서 저는 위로를 받곤 합니다.
살면서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 실수, 잘못, 혼란, 실패, 오류들을 통해 인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었던 작가들과 예술가들의 일기는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수와 실패가 아닌가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인생이 사이가 좋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미치지 않기 위해 미친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던 찰스 부카우스기 작가가 삶의 황혼에서 써낸 유머러스한 일기를 읽으면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번집니다. 일기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스위스 철학자 아미엘의 일기는 자기 자신을 무시무시하고도 철저하게 해부하는 정신의 단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백 여 권의 일기장을 남긴 작가 수전 손택을 어머니로 둔 아들 데이비드 리프는 유고가 된 일기를 세상에 내놓을 때 생기게 되는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가 있었는데요. 수전 손택의 일기를 읽어보니 과연 그럴만 했겠다 싶더군요. 어머니의 죽음을 견딜 수 없어서, 역설적으로 견디기 위해 써내려간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는 문장 때문에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 일기입니다. 정신과 마음의 변화를 기록하는 대신에 몸이 신호를 보내올 때마다 몸의 상태를 평생 충실히 기록한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적인 감동을 줍니다. 아,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저는 교감원문과 번역문을 정리한 ‘교감완역 난중일기‘본을 읽고 있는데요. 강직하고 흐트러짐 없는 문장, 잉여의 수사를 최대한 배제한 드라이한 문장을 읽으면서 수시로 감탄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풍부한 내용과 거침없는 필력은 두 말 하면 잔소리가 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지요. 이렇게 수많은 일기들을 얘기하다보니, 일기에 대한 책을 쓰고 싶은 욕심마저 생기네요. 재밌고도 흥미롭고, 우아하면서도 노골적인 일기들을 읽어보시면서 더운 여름을 나는 것은 어떠신지요.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 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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