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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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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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사용설명서_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_라디오칼럼_20170609

■ 방송시간 월요일 - 금요일 AM 07:5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6월 9일 금요일
■ 이화경 소설가

■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

◆ 문명 사용설명서 - 전남 나주시 동수동에서는 2년전 옛 집터 한 곳이 발굴되었습니다. 이 집터에는 높이가 1m에 달하는 커다란 굴뚝도 있었습니다. 굴뚝 구조물로 보아 아마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아서 겨울의 추위를 피했을 것입니다. 발굴된 옛 사람들의 집터 옆에서 잠시 천수백년 전 까마득한 세상을 이 곳에서 살았을 그들의 고단한 삶을 떠올려 봅니다. 모든 것이 불편했을 것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은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을 누렸을 것입니다. 동이 트면 일어나서 일을 했겠지만 해가 진 뒤에까지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두워진 밤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지 섣달처럼 긴겨울 밤에는 화덕 가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아침을 기다리는 것이 어쩌면 큰 일이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바쁘고 모든 것이 경쟁인 현대인들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전기불이 제공하는 대낮같은 조명 아래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편리한 발명품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우리는 문명이 가져다 준 이 거대한 진보가 과연 축복이었는가를 되묻게 되었습니다.
21세기에 막 접어든 2002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과로로 숨진 죽음을 의미하는 과로사라는 단어의 일본어 발음 ‘가로시’를 새로운 낱말로 등재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이 끔찍한 단어가 이제 우리 곁을 서성이며 이웃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세계적으로 과로사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뿐입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현상 앞에 모든 사람이 공평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과로사라는 단어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생활을 매우 편리하게 해 준 전기와 같은 과학의 발명에 찬사를 보내지만 이러한 문명의 발전이 노동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재앙도 함께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와서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문명사용의 수칙’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두워지면 우리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더 이상의 일을 멈추고 전등의 스위치를 스스로 내릴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법과 제도와 정부가 적정한 노동시간을 지켜주기 전에 우리 스스로라도 지켜내야 했던 ‘현대 문명의 사용법’이었습니다.

◇ 진행자 - 박중환 관장은 전남 지역 유일의 국립 박물관인 국립 나주 박물관의 개관 업무를 총괄했고 현재 지역민들의 역사에 관심을 높이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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