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듣기
모란이 피기까지는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70510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5월 10일 수요일
■ 이화경 소설가
■ 모란이 피기까지는
◆ 이화경 소설가 -
*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5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방금 읽어드린 시는 김영랑 시인이 1930년에 발표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전문입니다. 강진 출신의 서정시인인 영랑의 이 시는 너무도 유명해서 어떤 해설을 덧붙이는 게 사족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어느 날, 이 시를 읽다가 저는 갑자기 묘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바로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문장 때문이었는데요. 사실 모란이 지고 말아버린 삼백 예순 날을 운다는 시적 화자의 슬픔에만 저의 감상이 늘 머물러 있었습니다. 일 년은 삼백육십 오일인데, 울면서 기다리는 삼백 예순 날을 빼면 나머지 닷새가 남습니다. 시인이 명시하지 않고 숨겨놓은 닷새가 말 그대로 제게 팍 꽂혔습니다. 천지에 모란이 피어나서 뻗쳐오르는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닷새라는 은유를 통해 일장춘몽과도 같은 우리 인생을 표현했구나 싶었습니다.
모란은 닷새만 핍니다. 모란이 피는 닷새가 지나고 나면, 삼백 예순 날을 하냥 섭섭해서 웁니다. 그래서 모란이 피기까지 봄을 기다리고, 모란이 지면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깁니다. 누구나 인생의 5월 어느 순간 모란이 피었던 환한 봄날이 있을 것입니다. 삼백 예순 날 피어날 것 같은 젊음과 사랑이 뚝뚝 떨어져버린 뒤에야 젊음도 사랑도 봄날 닷새만 피는 찰나의 꽃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봄날도 가고 복날도 가는 걸 알면서, 젊음과 사랑을 여읜다는 게 뭔지를 알면서 우리는 늙어갑니다.
요즘 모란이 한창입니다. 모란이 지면 이 봄과도 이별하겠지요. 이별은 늘 아프고 잔인합니다. 닷새만 사랑해서 행복하고 삼백 예순 날을 슬퍼해야 하기 때문에 봄과의 만남은 잔인합니다. 하지만 꽃이 지지 않으면 봄이 아닙니다. 끝이 없는 봄은 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날이 가야 다음 봄날이 옵니다. 올봄이 죽어야 내년에 다음 봄이 부활합니다. 그러나 최초의 봄이 없다면, 처음의 모란이 없다면, 다음에 올 봄에 대한 기약이 없습니다. 기약이 없는 삶은 죽은 삶입니다. 죽은 자는 다음에 올 봄에 대한 기약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저도 오랫동안 힘들게 끌고 왔던 소설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아무래도 모란을 보러 강진엘 좀 다녀와야겠습니다. 영랑 생가 근처에 수령이 350년이나 된 모란이 대구에서 옮겨져 왔다고 하니, 찬란한 슬픔의 봄을 350년이나 견뎌 오신 모란님을 뵈러 가야 할 듯 싶습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 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