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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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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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려받은 이름, 빌려온 이름 _박중환 관장_라디오칼럼_20170307

■ 방송시간 월요일 - 금요일 AM 07:5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3월 7일 화요일
■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

■ 물려받은 이름, 빌려온 이름

◆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 - 지난 2006년 나주 다시면의 복암리 들판 논바닥에서는 백제시대에 나무조각위에 붓글씨로 쓴 목간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공기와의 접촉이 차단된 진흙 속에서 1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썩지 않고 견뎌낸 나무조각들입니다. 복암리의 목간 가운데는 농촌의 마을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가구별로 가족구성원의 연령대와 인원수를 기록한 호적 문서도 들어 있었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성인 남성에 해당하는 장정들의 이름 만을 적었을 뿐 여성이나 어린 아이들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집주인인 호주의 아내라거나 딸, 아들 몇 명이라고만 표기했습니다. 여성이나 미성년자들의 고유의 이름을 부르거나 쓰지 않았던 관습은 복암리 목간이 쓰이던 삼국시대 뿐 아니라 그 뒤에도 오래동안 이어진 관습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나 남편의 이름 아래 자신의 사회적 대표성을 맡기고 무명의 긴 시간을 보내온 긴 역사를 돌아볼 때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기억되는 오늘의 사회는 어떻게 보면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나 남편의 이름 아래 자신의 사회적 대표성을 맡기고 살아왔던 그 낡고 부끄러운 껍데기는 완전히 깨진 것일까요. 사람의 이름 자체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것이지만 성장한 뒤의 이름의 가치는 자기 스스로 일군 것이어야 합니다.
최근의 특검 수사과정에서 세계 유수의 대기업 총수가 구속되면서 법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경영능력을 공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에서 경영자의 위치에 올라선 재벌 3세였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일구지 않은 영향력을 물려받은 사람들의 도덕성도 함께 심판대 앞에 선 것입니다. 재벌가의 후계자들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지위와 영향력의 원천이 과연 자신의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입니다. 자기 이름의 영향력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물려받은 것이거나 빌려온 것이라면 그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거부해야 할 허명인 것입니다. 물려받은 것과 스스로 일군 것과를 분별하고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마련하는 것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상속세처럼 준엄하게 세워야 할 우리 사회의 숙제입니다.


◇ 진행자 - 박중환 관장은 전남지역 유일의 국립박물관인 국립나주박물관의 개관업무를 총괄했고 현재 지역민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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