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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 깊다 #17- 퇴계와 고봉의 사상 로맨스
남도는 깊다 제 17편 퇴계와 고봉의 사상 로맨스
- 시대를 넘어 존경받는, 대한민국의 천원권 지폐 표지모델 퇴계 이황(1501-1570). 요즘으로 보자면 교육부 장관쯤 되는 성균관 대사성을 맡고 있던 1558년 10월, 그의 나이 58세때 32세의 새파란 후배 고봉 기대승(1527-1572)을 처음 만난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뭇선비들과 임금의 신망을 받던 퇴계. 막 과거에 합격한 26살 아래의 손자뻘 후배 기대승. 이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나이를 뛰어넘어 조선 성리학 지도를 확 바꿀 '사상 로맨스'를 시작한다. 이른바 '사단칠정논쟁'이 그것으로, 인간의 이기(理氣)를 둘러싼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논하는데 퇴계의 생애를 다할 때까지 그 논쟁은 계속된다.
이와 기를 나누어 보았던 퇴계의 논지를 고봉은 이기는 모두 같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 반박하고, 대학자 퇴계는 고봉의 논리를 일부 수용하고 일부 이견을 내고, 다시 고봉은 대선배의 논리를 수용하면서 일부 이견을 내고.. 한양, 안동, 광산을 오가며 계속된 그들의 편지 논쟁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으며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관심을 표하는 이슈가 되었다. 당대는 연산군, 중종대, 명종대에 일어난 사화(士禍)로 사림의 입지가 크게 위축되었던 시대. 특히, 명종 1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로 많은 선비들이 죽고 외척 윤원형과 명종의 친모 문정왕후가 권력을 농단하던 시대.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은 폭력과 부패로 얼룩진 시대에 학문적 풍토를 일으키고, 정암 조광조대에 이루지 못한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하려는 선비들의 열정이 담긴 새로운 문화조류였다. 토론의 승자를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두 사람의 토론은 중국 성리학의 수입국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적인 성리학 토대를 이루는 변화였고, 향후 사림들의 화두가 되다시피 했다. 고봉 기대승은 명종 이후 선조 즉위 초 경연을 주도하며 소장 선비들의 입지를 넓힌다.
율곡 이이가 등장하기 전까지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분투하던 고봉은 대선배 이황이 타계한 지(1570년) 2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가던 길에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너브실마을, 월봉서원에 가면 그의 발자취와 향기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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