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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깊다 ; #경양방죽 #매립
남도는 깊다 제 9편 경양방죽 매립의 역사
-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당시 전라남도지사였던 야지마는 일본 건국 기원 2,600년 기념사업으로 경양방죽을 매립해 일본인 집단 거주지를 만들기로 한다. 최흥종 목사와 뜻있는 광주 사람들이 '경양방죽 매립반대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반대운동을 펼쳤지만 결과는 '완전 매립'에서 '일부 매립(2/3 매립)'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30년 후. 1/3만 남아있던 경양방죽은 시가지 개발계획에 의해 완전 매립되고 만다. 그것도 매립 예산이 부족해 인근에 있던 태봉산을 헐어서 방죽을 메운다.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의 랜드마크 두 가지가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경양방죽이 있던 자리인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은 옛 광주시청이 있다가 지금은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 있다.
화(火)가 성한 고장에 방죽이 사라지면 광주의 앞날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여론이 일어 1969년 전남대학교 안에 인공연못 하나가 조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용지(龍池)다. 용지(龍池)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광주의 명물에 대한 안타까운 대체물쯤 되는 것이다.
지금도 광주광역시 계림동 부근에는 경양이라는 표지가 남아있다. 경양로, 경양마을 버스 정류장, 광주은행 경양로 지점이 그것이다. 스러져간 역사에 대한 아쉬움을 아는 세대도 늙어만 가고 있다. 지금의 풍암 저수지, 운천 저수지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발길을 보면 광주 사람들에게 역사가 깃든 경양호의 부재는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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