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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 깊다 #4- 금남로의 역사
남도는 깊다 제4화 '금남로의 역사'
- 광주 금남로(錦南路)는 조선 중기의 무장 금남 정충신(鄭忠信, 1576-1636)을 기려 만들어진 도로명이다.
금남 정충신은 할아버지(정석주) 때부터 병영의 서리를 지낸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광주의 아전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무를 겸비했다고 전하는 정충신. 임진왜란때 17살이었던 그는 피난중인 선조에게 적병들을 뚫고 장계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인조때에는 안주목사로 이괄의 난 진압, 병자호란때는 부원수로 전쟁에 참여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용맹한 무장이었던 금남 정충신. 다산 정약용이 광주에서 서울을 오갈 때 쓴 시에도 정충신이 등장한다.
"매번 광산부를 지날 때마다/오래도록 정금남 선생을 생각한다네/태어난 곳은 좁게 뻗어 작은 곳이어도/재능은 순 임금의 신하에 뒤지지 않는다오/
옛 사당에는 어지러운 세상의 기운 서리고/ 터만 남은 곳에서 어르신들 정충신 이야기하네/
웅장하구나! 서석산이여/뛰어난 인물을 길러냈도다."
금남 정충신의 시호에서 명명된 도로명, 금남로.
하지만 이 금남로라는 명칭은 정충신이라는 인물보다 근현대 민주인권 항쟁의 상징으로 호명된다.
일제강점기 때는 메이지마치(明治町)라 불렸던 금남로. 옛전남도청 자리가 총독부 건물이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쳐 1980년 광주항쟁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곳이 이곳이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처참한 살육이 자행된 곳이고, 시민군들의 항쟁 중심지이자 계엄군이 퇴각한 뒤 평화로운 커뮤니티를 이루었던 곳도 이곳, 금남로였다.
옛 전남도청이 있던 곳, 광주의 도심 중에 도심이었던 금남로는 그런 피 어린 항쟁과 번영의 역사를 뒤로 하고 조금씩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드는 곳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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