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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본색 정면응시)전두환의 죽음이 남긴 것

(앵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알리는 외신 보도 중에는 ‘광주의 도살자’가 숨졌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이지만 독재자, 학살자로 기억되는 사람.

그는 끝끝내 반성과 사죄는커녕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남기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그를 평가하겠지만, 그에 앞서 오늘 시사본색에서는 전두환이 왜 용서받기 어려운지 하나하나 짚어보겠습니다.

김철원 기자 나와 있습니다..


(앵커)
노태우씨가 사망한 지 불과 한 달이
안 돼 전두환이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망을 대하는
시민들의 자세는 달라 보입니다.
왜 그렇다고 봐야 할까요?

(앵커)
전두환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탄압한
독재자였지만, 사실 집권하는 과정도 불법적이었죠?


전두환의 집권 전과 후를 연구하고 조사한 조선대 노영기 교수의 말을 통해 집권과정과 집권기간 동안의 불법행위가 갖는 의미를
들어보시겠습니다.

◀VCR1▶

(인터뷰)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교수(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
"그 사람들 하는 이야기가 당시 (1979년 12.12 군사반란) 안보를 이야기 하는데 전방을 지키는 병력을 후방으로 빼돌려서 안보를 위협했죠. 냉정하게 따지면 국가안보가 제일 위험했던 시기가 1979년 12월 12일이죠. 전방에서 휴전선을 지키고 있던 9사단이 사단장이 노태우였는데 그 병력이 서울로 들어왔으니까요.

"그 당시(1980년 5.18 당시) 전두환의 직책은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었지만 또다른 한편으로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하고 있었어요. 그 모든 군의 정보는 보안사령부를 통해서, 일상의 정보들은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이미 받고 있는 위치에 있었고 국무회의에 들어갈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직책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전두환이 5.18을 몰랐다? 그거는 무능한 거죠. "

"전두환정부 시절 일들 보면 5.18 문제제기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하는 오월운동이 전개되는데 그 중심에 대학생들이 많았어요.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을 끌고 가서 강제징집을 하고 더 나아가서는 과거에 같이 민주화운동 하던 동료들을 불어라. 친구들을 불어라 선후배들을 불어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바로 녹화사업이죠. 그걸로 6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공안사건들 예를 들면 계모임에서 백일잔치했는데 그게 공안사건이 되고 충청도 아람회 사건인데 그런 식으로 조금이라도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조직이 만들어지고 그게 공안사건이 되는 거예요. 민주주의나 자유라는 것 자체가 입에 오르내릴 수 없을 정도로 쉽게 상상하면 요즘 미얀마 분위기이지 않을까. 그랬던 시기가 전두환 시절이었죠."

(앵커)
집권 기간에 철권을 휘둘렀지만
권력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퇴임 이후에 결국 법정에 서야했죠?

(앵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지만 결국 2년만에 풀려났습니다. 김영삼 정부 막판에 사면을 받았기 때문인데요.

당시에는 국민통합을 이유로 들었지만
전두환의 이후 행적을 보면 사면 결정이 잘 한 것이었는지 의문이 듭니다.

전두환 회고록과 관련한 재판의 소송 대리인으로 4년을 싸워온
김정호 변호사로부터 재판이 갖는 의의를 들어보고 전두환의 죽음이
재판과 진상규명에 미칠 영향을 들어보시겠습니다.

◀VCR2▶

(인터뷰)김정호 변호사(故 조비오 신부 조카 조영대 신부 소송대리인)

"(전두환은 회고록 출판으로) 5.18 왜곡을 통해서 본인을 정당화하는 마지막 왜곡의 절정판을 쓰고 가겠다는 아주 나쁜 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 한국사회가 모든 것을 정파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어떤 보편적인 상식과 정의의 문제조차도 정파적으로 소비되는 갈등의 구조에 놓여있는데 그 갈등구조에 더 불을 지피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관심이 전두환이 사망함으로써 형사재판을 못하니까 진상규명을 못하는 것 아니냐 이런 우려의 시선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형사재판은 쟁점 자체가 헬기사격 하나 뿐이고 사법적 단죄로 의미가 있었던 겁니다. 그 때 당시 형을 받았는데 국민적 동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너무 쉽게 사면을 해주고 그러다보니 2017년에 왜곡의 집대성판인 전두환 회고록이 나왔고 그래서 간접적인 명예훼손이라는 작은 죄명으로라도 다시 한번 사법적 단죄를 해보자. 사법적 단죄 차원에서 피고인 재판절차가 좀 중단된 것이 아쉽다 이런 측면이 있고요.

오히려 진상규명 측면에서는 여전히 달라질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헬기사격을 포함한 북한군 개입설, 암매장 부분, 또 광주교도소 습격 허위주장, 무기고 피탈시간 허위조작을 포함한 여러가지 쟁점을 그대로 민사재판 1심에서 이미 승소판결을 받았고 항소심에서도 결심을 앞둔 상태에 있습니다. 민사재판에서 진상규명의 나머지 과제들은 충분히 규명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두환의 죽음과 이광영의 죽음은 가해자로서 성찰하지 않고 뻔뻔한 모습의 전두환이 마지막까지 호사를 누리고 골프치고 호화오찬을 하고 이 과정을 다 기득권을 누리다 자연사한 모습, 이광영은 당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 아니라 피 흘리고 쓰러져간 시민을 구조한 적십자 활동을 한 사람인데 그 과정에서 본인이 척추에 총탄을 맞아서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마음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늘 해오셨던 분이거든요. 헬기사격 재판에 증인으로 나왔고 그런데 피해자로서의 모든 고통을 다 보여주는 모습을 살다가 비극적으로 자연사가 아닌 자살로 마감했잖아요. 가해자가 보였던 가장 못된 모습으로서 전두환이 천수를 누리는 모습과 피해자로서 고통을 겪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는 이 모습이 우리 사회에 정말 정의가 있는 것인가 정말 곱씹어봐야 할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앵커)
전두환의 독재와 만행이 지금이라면
국민들이 탄핵하자고 했을 법한데
당시엔 왜 그런 요구들이 없었을까요?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독재정권의 나팔수였던 MBC, KBS의
전두환 찬양방송내용을 보시겠습니다.

◀VCR3▶

(녹취)kbs,mbc 전두환 찬양방송 (출처 2007 방송 KBS 미디어포커스)
"..."

(앵커)
광주시민, 특히 80년 5월을 경험한 분들이 전두환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5.18이 아니고도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인권 유린이나 비리가 많았죠?


◀VCR4▶

(녹취)
"이렇게나 지은 죄가 많은데 왜 반성하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왜 책임지지 않습니까?"

(앵커)
전두환은 죽었지만 죽음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겠죠.

역사가 그의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 있도록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철저한 조사를 기대합니다. 김 기자, 수고했습니다.

김철원
광주MBC 취재기자
시사보도본부 뉴스팀장

"힘있는 자에게 엄정하게 힘없는 이에게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