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광주MBC 5.18 연속 기획보도 '33년 전 오늘'.
오늘은 비극의 직접 원인으로 지목되는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문제를 짚어보겠습니다.
계엄군이 휘두르는 곤봉과 대검에 당시 금남로는 피로 얼룩졌고 시민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습니다.
김철원 기자입니다.
(기자)
한 시민이 쓰러져 있습니다. (1980.5.19.월요일, 밤부터 비(5.6mm), 낮최고기온 22도)
머리가 피투성이인 이 남자,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바라는 표정입니다.
아무 이유없이 계엄군이 휘두른 곤봉에 맞은 겁니다.
(인터뷰)최병귀/ 5.18 유공자(화면 속 피 흘리는 당사자)
"저도 이해가 안가요. 그게. 우리가 나쁜 짓을 하고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바둑을 두고 있는데 무엇이 후다닥하길래 고개만 돌린 것밖에 생각이 안나요. 반항을 한다든가 싸움을 했다든가 그런 것도 없이 느닷없이 맞아버리니까 정신이..."
진압은 하루 전보다 더 잔인해졌습니다.
구타나 폭행이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계엄군은 달아나는 시민들을 쫓아가서 기어이 붙잡았습니다.
잡힌 사람들을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고, 군홧발로 걷어찼으며 남녀 할것없이 옷을 벗겼습니다.
(인터뷰)박금옥/광주 양동시장 상인(당시 양동시장 상인)
"우리 시민들이 보고 있으면 열이 안 날 수 있겠어? 나 그 때 총에 칼 꽂은 것 처음 봤네..."
일반 곤봉보다 20센티미터 더 길게 깎은 박달나무 곤봉은 주로 사람들 머리를 노렸습니다.
M16 소총에 꽂은 대검으로는 사람들을 마구 찔렀습니다.
(인터뷰)안성례/오월 어머니집 전 관장(당시 광주기독병원 간호사)
"대검으로 예리하게 찔린 상처들이었어요. 피가 팍팍 솟잖아요. 동맥이 그러니까. 우리 옷에도 피가 솟구치고 벽에도 피가 솟구치고......"
5.18 초기 계엄군이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들을 때려 잡았는지는 당시 경찰 방침과 비교해보면 선명히 드러납니다.
당시 31사단장인 정 웅 소장조차 계엄군 진압이 너무 잔혹하다며 자제를 명령했지만 특전사 군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최영태/전남대 사학과 교수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사람, 남침을 유도하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적이다. 계엄군은 그렇게 배웠어요. 따라서 시내에서 시위를 하는 대학생이나 시민이나 모두가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는 적, 빨갱이. 그래서 그들은 곤봉을 휘두르면서 '이 빨갱이들아' 라고 외치면서 했고..."
한편 5.18 최초 희생자인 김경철씨는 이날 새벽 광주 기독병원에서 숨집니다.
전날 금남로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게 직접 사인이었습니다.
계엄군의 이런 살인적 진압에 시민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워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냐며 답답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이런 감정은 곧 불의를 저지른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분노로 발전하게 됩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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