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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죽경-광주시민들의 헌신

우종훈 기자 입력 2019-05-15 20:30:03 수정 2019-05-15 20:30:03 조회수 0

(앵커)
주먹밥과 헌혈은
오월 광주의 시민정신을 나타내죠.

병원 앞에 길게 늘어선 헌혈 행렬은
상처입은 시민들을 치료하는 의료진들에도
목이 메는 장면이었습니다.

또 더 중한 환자를 보살피라며
생사의 갈림에서 자신을 희생한
시민들도 의료진들을 울컥하게 했습니다.

우종훈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집단 발포가 있었던 80년 5월 21일.

금남로와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전남대병원에는 이날 하루만 74명이
부상을 입고 병원을 찾았습니다.

전남대병원 외과 조교수로 일하던
김신곤 교수는
그날의 병원을 아수라장에 빗댔습니다.

(인터뷰)김신곤/전남대학교 명예교수(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조교수)
"몇십 명 단위라고 해야겠죠. 몇십 명이 이렇게 거적때기로 구루마로 오토바이로 오니까 누가 차분하게 병력을 (분류)하고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죠."

하지만 시민들은 성숙했습니다.

환자들은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도
본인보다 부상이 심한 이들을 먼저 살피라면서
의료진에 부탁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중하다고 판단한 의료진이
오히려 수술을 권유할 정도였습니다.

(인터뷰)안성례/오월어머니집 전 관장(당시 기독병원 간호감독)
"'이분을 복도에 놔두면 안 되겠다' 그래가지고 '빨리 수술실로 옮겨야 되겠다' 그러니까 그분이 그랬다니까. '아니 저 사람이 나보다 더 중하잖아요.' 자기가 살겠다고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했죠.)"

병원은 모든 시설과 물자를 동원했지만
밀려드는 환자를 치료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혈액은 금세 동이 났고
의료진은 '피가 부족하다'며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헌혈을 촉구하는 가두방송이 났고
'동포가 죽어간다'는 호소에
광주 시내 병원들은 피를 내주겠다는 시민들로
북적였습니다.

(인터뷰)서순팔/전남대학교 명예교수(당시 전남대병원 임상병리과 레지던트)
"헌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능력 범위 밖에 그렇게 많이 모여드니까 팔을 걷어붙이고 달라붙어서 헌혈사업을 했죠. 그러니까 한 40에서 100명 정도 이상이 순식간에 줄을 서는 것이에요."

부족했던 혈액은
다른 병원에 보내줄 만큼이 넉넉해졌고
치료에 필요한 다른 물자를 구하는 데도
시민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쓰일 산소가 부족해지자
차량을 가진 시민들이 산소통을
옮겨다 줬고

수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에
일반병동 환자들은 자신이 맞을 수액을
응급실에 내려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인터뷰)정성수/전남대학교 명예교수(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 인턴)
"'이 수액이 어디서 왜 이렇게 많이 내려왔냐' 했더니 병실에 입원한 환자들이 전체가 다 '나는 수액을 안 맞겠다' 해서 거부를 했다 그래서 그 수액이 전부 응급실로 내려왔다 (얘기를 들었죠.)"

의료진들은 질서를 지킨 시민들 덕에
한명의 환자라도 더 살릴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성숙한 의식은
병원 밖에서도 한결같았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총기로 무장했지만
강력범죄와 사고는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고,
항쟁이 끝난 뒤에는
자발적으로 총기를 반납했습니다.

(인터뷰)김영진/화순전남대병원 외과 교수(당시 전남대병원 외과 레지던트)
"계엄군이 물러난 뒤에 공수부대 물러난 뒤에는 광주시 안에는 완전한 평화였거든요, 사실은. 저희(병원)들 환자들도 없었고."

(스탠드업)
"이성을 잃은 계엄군의 총탄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광주의 시민들. 광주 시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힘은 '타인을 먼저 살피라'는 희생정신이었습니다. MBC뉴스 우종훈입니다."

◀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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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종훈 hun@kj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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