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5.18 당시 신문과 방송은 사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시민들을 폭도로 몰았습니다.
이같은 언론 부재 속에서 시민들은 유인물과 가두방송으로 신군부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습니다.
33년 전 오늘 기획보도, 김철원 앵커입니다.
(기자)
광주문화방송 건물이 불타고 있습니다.(1980년 5월 20일 화요일. 낮에 비(12mm) 낮최고 17.5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도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는 데 분노한 시민들이 이날 밤 MBC와 KBS 등 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항쟁 기간 동안 시민들을 폭도로 몰았던 방송들은 전두환 집권 내내 땡전뉴스로 전락했습니다.
(녹취)KBS 특별기획 '광주사태'(1985.6.8 방송)
"극에 달했던 난동자들의 방화, 파괴, 살인, 약탈행위 등의 난동은 정부 및 계엄당국의 설득과 선무활동의 효과와..."
신문도 신군부의 검열과 보도 통제 때문에 광주의 진실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인터뷰)문순태/소설가(당시 전남매일 편집국장)
"광주에 살고 있는 기자로서 역사 앞에 가장 치욕적인 것이고 큰 역사적 부채감을 갖고 있는 게 그 기간 동안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거죠."
시민들은 여기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군인들이
시민들을 죽이고 있다고... 이 사실을 미치도록 알리고 싶었지만 이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언론이 사라진 세상, 그래서 시민들은 스스로 언론이 됐습니다.
육필로 쓴 대자보와 성명서,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고, 가두 방송으로 상황을 알렸습니다.
(녹취)당시 가두방송
"광주시민 여러분, 여기는 대학생 수습대책위원회 방송반입니다."
들불야학 강사들이 만든 투사회보는 대안언론 중에서도 단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인터뷰)전용호/광주전남 소설가협회장 (당시 투사회보 제작팀장)
"전 날에 있었던 큰 사건, 피해상황이라든지 계엄군 이동경로라든지 진상을 밖으로 알려야겠다 이런 취지에서 진행을 했는데 결국은 그것이 언론의 역할을 겸하게 된 것이지 않은가."
한편 이날은 계엄군에 밀리기만 하던 시민들이 전세를 역전시킨 날이기도 합니다.
계엄군의 만행을 보다 못한 택시기사들이 나선 겁니다.
(인터뷰)장훈명/당시 차량시위 참여택시기사
"학생들 우리가 방패막이가 돼주자. 맨 몸으로
는 안되겠고 장갑차 대형으로 차로 밀자. 차로 장갑차 형식으로 진영을 짜가지고...그 방법밖에 없다."
계엄군은 총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3공수와 11공수에는 밤 8시 실탄이 일제히 지급됐습니다.
밤 11시 광주역에서는 계엄군이 총을 난사해 시민 4명이 죽고 수십명이 다쳤습니다.
이같은 만행에도 금남로에는 무려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쏟아져 나왔고 다음날 새벽까지 밤샘 시위를 벌이며 계엄군을 압박했습니다.
시민들은 애국가를 불렀고 버스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인터뷰)박대현/(화면 속 당사자)
"그 때 그 정황이라면 정말로 젊은 사람 젊은 혈기라면 나처럼 하지 않았겠냐 그리고 실제로 또 했고요."
(스탠드업)
계엄군의 학살에 떨쳐 일어난 광주 시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3천명이 넘는 무장계엄군들이 앞에 있었지만 그보다 30배 더 많은 10만명의 시민들이 뒤에 있었기에 이대로만 밀어부친다면 밤샘시위 때 계엄군을 몰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넘쳤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 때만 해도 다음날 도청 앞 집단발포라는 비극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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