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80년 5월, 신군부는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지만
그렇다고, 잔혹한 참상의 진실마저 차단할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5.18 직전 부마민주항쟁을 겪었던 부산에서는,
광주의 진실을 전하려는 시도가 이어졌습니다.
신군부의 잔인한 진압을 비판하다 보안사로 끌려가 숨진
부산의 5.18 희생자, 고 임기윤 목사를 조명합니다.
부산문화방송 조민희 기자입니다.
(기자)
22년간 부산제일감리교회 담임 목사로 활동하던
고 임기윤 목사가,
1978년 직접 작성한 설교 원고입니다.
"서민생활은 견디기 힘들고,
속임수는 정치풍토가 됐다",
"교회가 옳은 말을 못 한다."
엄혹한 유신체제 속에서,
독재정권을 향한
직설화법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반 유신, 구속자 석방 운동을 주도하며
70년대 부산의 민주화운동을 이끌었습니다.
* 박철/원로 목사
"부산에 오셔서 35년 목회를 하셨어요.
'현실 참여' 이런 진보적인 목회를 하셨던 분이죠.
부산 민주화운동의, 어떻게 보면 대부같은..."
그리고 80년 7월.
(00' 의문사위원회 자료)
임 목사는 시국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광주학살의 진상을 전하며,
신군부의 등장은 역사적 죄악이라고
정면비판했습니다.
설교내용을 추궁하는 정보경찰들에게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5.18 두달 뒤,
501 보안대에 들어갔다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사흘 뒤,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사망했습니다.
*임정현/고 임 목사 아들
"생명유지장치를 쓰면서, 생명만 유지하는 그런 상태였죠."
(부산대병원 사망진단서)
보안사는 '병사'를 주장했습니다.
갑자기 뇌출혈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하지만, 유족들은 고문치사를 확신했습니다.
숨진 임 목사의 시신에서
심각한 구타의 흔적이 발견된 겁니다.
*임정현/고 임기윤 목사 유족
"멀쩡하던 사람이 들어가서 병사인데. 어머니가
계속 얘기했던 '두개골이 깨져있었다'는 것, (또)
아버지를 이장할 때 두 분이 오셨는데, 두개골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두개골을 보고 '이거는
맞지 않으면 깨질 수가 없는 그런 상처다'..."
(00' 의문사위원회 자료)
지난 2001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폭력에 의한 사망'을 인정했지만,
'의문사'로 결론지었습니다.
어떻게, 왜 사망했는지 알지 못한 채 흘러온 43년.
'광주 밖 5.18의 네 번째 희생자',
고 임기윤 목사는 잊혀졌습니다.
* 박철/원로 목사
"같이 끌려갔던 사람 중에서
임기윤 목사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걸 몰랐다는 거요.
한참 지나서, 세월이 지난 다음에 알 정도로. 굉장히
하여간 엄혹한 상황이었죠."
고 임기윤 목사는 지금 고향인 부산이 아닌
국립 5.18 민주묘지에 잠들었습니다.
* 임정현/고 임기윤 목사 아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너무 억울했죠.
사랑하는 아버지가 갑자기 얼굴도 안 보고 이렇게
돌아가셔서 나왔으니까. (사인이)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어요."
MBC뉴스 조민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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