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광주문화방송은 오늘(8) 5.18이 일어난지 44년만에
창사 60주년 기념식에서 오월영령과 광주시민,
그리고 국민들에게 처음이자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사실 5.18과 광주MBC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아픈 역사가 있죠.
44년 전 광주MBC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임지은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광주항쟁 둘째날인 1980년 5월 19일,
계엄군의 구타로 시민 김경철씨가 숨졌습니다.
5.18 첫 사망자였습니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이날 광주MBC에서 이 소식을 접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방송에서는 "이번 시위에 사망자가 1명도 없으며,
유언비어에 속지 말자"는 자막 방송이 축구중계 도중 송출됐습니다.
계엄분소장이 작성한 담화문을 방송하라는
계엄군의 지시에 저항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없다"고 왜곡보도를 한 겁니다.
*이문석 5.18 당시 광주MBC 라디오PD
"유언비어에 속지 마십시오. 단 1명의 사망자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눈 앞에 수없이 죽어간 학생 시민을 목격한 시민들은
방송국에 빗발치는 항의 전화를 걸어오고 분노를 터뜨렸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에 물러서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전남도청 옆 궁동에 위치한 광주MBC로 몰려들었습니다."
왜곡보도와 축소보도를 항의하는
시민들의 규탄이 이어졌고 화염병도 날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임영희 송백회 회원 (지난 2023년 광주MBC 뉴스데스크)
"플래카드, 대자보, 유인물 제작. 화염병 투척을 광주MBC, 죄송합니다만 투척도 하고."
밤 8시를 전후로 광주MBC를 태우기 시작한 불은
밤 10시쯤에는 광주시내 전역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불기둥으로 번졌습니다.
전두환의 편의대가 일으킨 자작극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지만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광주MBC 방화사건이
왜곡보도와 축소보도로 인한 것이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신동일 5.18 조사위 광주MBC 방화사건 조사 담당 팀장
"시민들 입장에서는 시위 내용과 시민들의 입장은 보도하지 않으면서,
계엄 사령부의 내용만 그대로 되뇌는, 그런 보도 태도에
분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광주MBC 방화 사건은 5.18의 상징적 사건임과 동시에
사실보도를 하지 못한 언론사를 시민들이 직접 응징했다는 점에서
언론사적으로도 의미가 큰 사건입니다.
*한 선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지역 방송이라는 이미지는 MBC가 갖고 있었단 말이에요.
MBC마저도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으니까 그 시민들의 분노가 MBC를 향해 왔던 것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맥락에서 볼 때 그때의 요구는 지금 시민들의 요구하고도 사실은 일맥상통하는 거예요."
광주문화방송의 구성원들은 사죄의 의미로 그 누구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5.18의 진상규명과 광주정신의 보편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해마다 5.18 다큐멘터리와 탐사보도를 이어가고 있는데
올해도 '항쟁과 헌법'이라는 제목의 창사특집 토론을 편성했고
5.18 판도라의 상자로 여겨지는 미국 범정부차원 비밀전문 체로키파일의
실제 작성자를 찾아내는 탐사보도를 선보였습니다.
*로버트 리치 / 5.18 당시 미 국무부 한국과장(체로키 파일 작성자)
/광주MBC 5.18 44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그가 죽었다'
"첫 번째 집단 발포 명령자는 현지 지휘관이었다고 주로 간주하고 있죠.
하지만 전두환까지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44년 전 광주MBC가 권력자에 저항해
사실취재와 진실보도라는 사명을 다했더라면
광주학살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MBC뉴스 임지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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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취재기자
보도본부 뉴스팀 탐사*기획 담당
"아무도 보지 않을 때도 주목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