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현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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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사람] 나의 아버지, 5.18발포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안호재 씨)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30~08:57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황동현 진행자(이하 황) -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경찰관이 계셨습니다. 바로 고 안병하 치안감인데요. 어제 그분이 쓴 광주 시민들에게 남긴 비망록 8장이 공개됐습니다. 부인이신 전임순 여사와 또 셋째 아들 안호재 씨가 어제 오후 2시에 5.18 민주화 운동 기록관에서 관련에 기자회견을 가지셨는데요. 안병하 전 치안감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 그러시면서 이 발포를 거부하셨죠. 다시 말해서 이 5.18 당시의 우리들의 영웅이시기도 합니다. 그분의 아들 고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이신 안호재 씨 스튜디오에 직접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십니까?
◆ 안호재 (이하 안) - 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 – 네, 어머님 이렇게 같이 서울에서 살고 계시죠?
◆ 안 – 네.
◇ 황 – 네, 그러면 어제 기자회견 때문에 내려오신 건가요?
◆ 안 – 네, 어머님이 연세가 이제 85세가 넘으셨습니다. 마지막일지 몰라서 올해 내려오게 됐습니다.
◇ 황 – 네, 정말 우리 안 선생님 가족에게 있어서 5.18은 정말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시는 그런 5.18이실 텐데요. 어제 기자회견에서 광주 시민에게 우리 안병차 치안감께서 남긴 8장 분량의 비망록을 또 관련해서 기자회견도 하셨는데 담긴 내용 좀 소개해 주시죠.
◆ 안 – 네, 5월 17일 날부터는 광주가 다른 어느 지방보다 평온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임시편성된 경찰, 기동대가 본대로 복귀를 하고. 그리고 일개 기동대 같은 경우는 야유회를 갈 정도로 광주시가 평온했습니다. 18일 날 이제 반환점을 갖게 된 겁니다.
◇ 황 – 네, 그 당시의 그 5.18, 이제17일 이후의 상황들에 대해서 우리 안 치안감께서 가졌던 생각이나 상황들이 이렇게 기록해 놓은 부분들이 비망록에 다 들어 있다는 말씀이신 거죠?
◆ 안 – 네, 그리고 광주 시민이 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 황 – 네, 어떻게 보면 저도 그 비망록 일부를 이렇게 쭉 봤는데요. 당시 평화로웠다는 말씀을 방금하신 것처럼 이 평화로운 광주를 이 분란의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이 결국 계엄군들이 진주하고 들어온 것 그 부분 아니었겠습니까?
◆ 안 – 네, 맞습니다.
◇ 황 – 네, 우리 안 치안감께서는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말씀을 평소에 하셨고 비망록에 그런 내용을 담으셨죠?
◆ 안 – 88년도, 5.18 청문회를 앞두시고 솔직히 밝힐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아버님이 몰래 쓰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 황 – 이 비망록은 그러면 5.18 그 당시 청문회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청문회를 앞두고 그런 부분들이 현장에서 밝히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기록을 남겨두신 거네요?
◆ 안 – 네.
◇ 황 – 그러면 이 비망록을 원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아니면 최근에 발견하신 겁니까?
◆ 안 – 아버님 돌아가실 때까지 몰랐다가 어느 시점 지나서 짐을 정리하다 보니까 한쪽 아주 깊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읽어 보니까 아버님이 하고 싶었던 말씀을 쓰시다가 다 못 쓰시고 중간에 돌아가시게 된 겁니다.
◇ 황 – 네, 이런 우리 안병하 치안감 같은 분이 계셨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 시민들의 피해가 최소화하지 않았을까 당시 그런 생각도 드는데요. 또 우리 안 치한감이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 선생님한테는 아버님이기도 하시지만 5.18을 겪고 아픔을 갖고 있는 광주 시민들에게 좀 짧게 소개 좀 해 주십시오.
◆ 안 – 80년 5월에 경찰은 광주 시민을 살리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습니다. 그 광주 시민은 보답을 했습니다. 80년 5월 21일 경찰이 한 2000명가량 철수할 때 시민군들은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민들이 대피하는 경찰에게 옷을, 사복을 빌려줬습니다. 그리고 몇 일간 밥을 못 먹었기 때문에 밥을 주시고. 타지에서 지원 나오는 대피 장소까지 가는데 길을 몰라서 길들을 안내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극심한 경우는 며칠 동안 재워도 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경찰이 한 거에 대한 보답을 광주시민이 했었습니다. 아버님은 그걸 아주 감사히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 황 – 그런 부분들에 대한 기억들을 평소에도 끊임없이 이렇게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셨어요?
◆ 안 – 이야기는 거의 못하셨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감시를 받고 있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남의 눈에 띌 만한 그런 걸 안 하셨습니다.
◇ 황 – 아버님께서 88년도에 돌아가신 것, 안 치안감님께서 돌아가신 것 아니겠습니까?

◆ 안 – 네.

◇ 황 – 그렇다면 그때는 이제 전두환 정부 시절이었기 때문에 계속 감시를 받으셨을 것 같고 굉장히 가족생활도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가족 입장에서는 아버님이 그때 다른 선택을 하셨으면 우리가 좀 더 행복하고 행복이라기보다도 편애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셨을 텐데 그런 데서 오는 여러 가지 갈등이나 이런 것도 좀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 안 –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도 좀 해 봤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이 하신 일을 하나하나 알게 되어 보니까 제가 어리석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 황 – 네, 시간이 흐르면서 과연 아버님이 어떤 분인지를 진작 이해하시면서 가치를 아셨다는 말씀이신데요. 지금 가족분들께서 5.18을 받아들이시고 하시면서 여러 가지 생각도 교차하실 텐데, 아버님 어렸을 때, 보셨을 때 그 고민하고 고뇌하는 과정들이 우리 선생님한테는 어떤 느낌이셨어요?
◆ 안 – 5월 20일인가, 21일 경에.
◇ 황 – 80년, 5월?
◆ 안 – 80년,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때는 거기 상황을 언론으로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이런저런 인사를 하시면서 가족들에게 한 마디를 남기셨습니다. 가족들이라도 잘 살아라. 그래서 저희 식구들은 아주 어쩔 줄 몰랐고. 저희가 그때 참 착잡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유언으로 듣다시피 했으니까요.
◇ 황 – 80년 그 당시의 아버님의 말씀을. 그리고 그 당시 바로 서울에 이렇게 못 가시고 그때 이 군부에게 끌려가서 고문당하시고 바로 그러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아픔이 80년부터 시작되신 거지 않습니까?
◆ 안 – 네.
◇ 황 – 선생님 앞으로 아버님의 명예 회복. 그리고 제대로 된 5.18을 좀 알리기 위해서 어떤 계획도 있으신 것 같은데, 한 말씀해 주시죠.
◆ 안 – 네, 올 연말 전까지 지금 추진하고, 민간단체들하고 추진하고 있는 게 안병하 영웅 경찰상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는 목적은 아버님의 정신이 이어져서 공직자가 바로 설 수 있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고 민간단체들하고 지금 추진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행은 안 되고. 아마 올 연말까지는 잘 될 것 같습니다.
◇ 황 – 네, 우리들 모두 안병하 치안감님이 해주셨던 그 모습을 광주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스튜디오에 아침 일찍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
◆ 안 – 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 – 네, 지금까지 5.18 민주화 운동의 영웅. 고 안병하 치안감의 아들이신 안호재 씨와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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