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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현의 시선집중_익산 쌍릉 주인, 백제 무왕 가능성 제기 그 배경과 의미는_부여문화재연구소 이상준 소장_20180720
■ 기획 김민호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황동현 진행자 (이하 황) - 100년 만에 재발굴한 전북 익산의 쌍릉의 주인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커지면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분석 결과를 토대로 백제의 역사 그리고 무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는데요. 익산 쌍릉에서 발굴된 이 인골함 분석 결과를 발표한 국립부여문화재 연구소 이상준 소장, 전화로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소장님.
◆ 이상준 (이하 이) - 네, 안녕십니까. 이상준입니다.
◇ 황 - 소장님 먼저 쌍릉이 익산에 위치한다고 들었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쯤입니까?
◆ 이 - 익산, 석왕동에 있습니다. 대왕릉, 소왕릉 두 개의 무덤이 180m 거리를 두고 같은 능선상에 남아있습니다.
◇ 황 - 두 개의 무덤이 능이 함께 있기 때문에 쌍릉이라고 표현하나 보죠?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이 익산 쌍릉에 대한 재발굴에 대해서 여러 유물들이 지금 발견이 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것들이 현재 발굴이 됐습니까?
◆ 이 - 사실 이번 발굴에서는 인골 외에는 특별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는데요. 그렇지만 일제가 단 이틀 만에 발굴을 완료를 하고 간략하게 제출한 게 있습니다. 그것을 토대로 이번 재발굴을 통해서 석실 구조, 봉분의 측조 방법이라든지 또는 구조적인 면을 많이 발견했고요. 특히 일제강점기 발굴에서 내부에서 목관이 나왔거든요. 목관을 치장했던 금동제 장식품들 그리고 어깨, 허리띠 장식품이라든지 토기 등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 황 - 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에 인골이 발굴이 됐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 재발굴이라고 이야기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100년 전쯤에 일제 때 발굴이 최초에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에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발굴이 이루어진 거죠?
◆ 이 - 그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때 그러니까 1917년도입니다. 먼저 여기 부여에 있는 능산리고분을 먼저 발굴을 했었거든요. 능산리고분 발굴이 끝나자 바로 익산으로 내려가서 장릉발굴을 착수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능산리고분과 익산에 있는 장릉 관계성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고있습니다.
◇ 황 - 중요한 것은 그때 발굴을 통해서 많은 어떤 부장품들이 유실되고 그 이후에 도굴을 통해서 사라져버린 안타까움이 있네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그래도 지금 인골이 남아서 인골의 즉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일 것 같은데 지금 인골의 정체는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크다면서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그렇게 추정하신 이유도 좀 들려주세요.
◆ 이 - 이번에 출토된 인골에 대해서 저희는 법의학적인 그리고 생화학적인, 유전자, 방사선 등등을 분석하였거든요. 그래서 아마 현 시점에서 동원 가능한 과학분석은 모두 하였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분석 결과는 인골의 주인공이 성별은 남성이고 나이는 60에서 70세. 그리고 키는 160에서 171cm 정도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망 시점인데요. 연도 측정을 하니까 사망 시점이 620년에서 659년 사이인 것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기록상 무왕이 641년에 사망했거든요. 이 기간 동안에 사망한 백제왕은 무왕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무왕 사망 당시 나이가 한 60살 전후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번 분석 결과하고 부합이 됩니다. 그리고 키도 조선시대 사람 키가 평균 160cm 정도로 연구가 되어 있거든요. 이런 결과를 참조하면 결코 작은 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한국사회 기록에 풍체가 훌륭하다교 표현한 기록과도 부합이 된다 이렇게 보고있습니다.
◇ 황 - 여러 가지 증거들을 좀 정리를 해 봤을 때 무왕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이야기이신데요. 이 백제 무왕 하면 백제의 여러 왕들 중에서도 후세에 가장 많이 알려진 왕이기도 하고 또 선화공주인가요? 이 설화 속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어떤 역활을 한 왕인지 좀 구체적으로 설명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 이 – 무왕은 위덕왕 이후에 해왕, 법왕이 연속으로 즉위를 하게 되는데요. 모두 1년 만에 죽게 됩니다. 당시에 귀족 간의 내분 그리고 대내외적인 정세가 불안정한 상태였거든요. 특히 왕실도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는데. 무왕은 저기 하면서 서동설화에 등장한 것처럼 신라하고 관계를 맺습니다. 그만큼 외교에 능했다. 이렇게 봐도 좋을 것 같고요. 특히나 고구려 수나라하고 전쟁을 하던 그 시기였는데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고 외교와 정책으로 실리를 얻은 그런 왕으로 기억이 되고요. 그렇게 대내적으로는 왕실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사비궁이라든지 궁남지, 왕흥사 등을 대규모 역사를 단행 하기로 합니다. 집권 후반기에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었던 익산으로 천도를 결심을 하고 왕궁성를 짓고 젝석사, 미륵사 등을 창건 하였습니다. 무왕은 아마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익산 경영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황 - 결국은 백제 후기 붐을 좀 꿈꿨던 왕으로 보이네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부여 중심으로 해서 귀족들이 굉장히 난립하고 이때 권한들이 세지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천도도 꿈꿨던 그런 왕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이 무왕이 특히 설화공주하고 이 설화는 결국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외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굉장히 친밀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가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조금 미신적인데요. 그건 선화공주와의 인연으로 증평왕하고 관계를 좋게 가졌을 때 또 신라를 적극적으로 침공을 합니다. 이중적인 대외 정책 같은 것으로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 황 - 이번에 불교문화재연구소의 이번 분석 결과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역사적으로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 - 지금까지 대왕릉이 준왕의 무덤이다, 무왕의 무덤이다 여러 논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발굴을 통해서 석실구조가 백제의 것이고 또 왕릉급 무덤이라는데는 의의가 없어졌습니다. 다만 주인공이 과연 무왕이냐 아니냐하는 데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는데요. 저희는 이번 인골 분석작업을 통해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설, 이것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했다, 했는데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 황 - 그리고 이 후기에 백제의 어떤 문화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앞으로 연구에 또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겠네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 - 네, 감사합니다.
◇ 황 - 국립부여문화재 연구소 이상준 소장과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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