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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현의 시선집중_백남기 농민의 정신이 깃든 백남기 밀밭, 그 의미는?_최강은 대표_20180531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김귀빈 진행자(이하 빈) - 6월 2일 시선집중 오늘까지는 저 김귀빈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다음은 전남 보성군 옹치면 유산리 부춘마을 밀밭으로 가겠습니다. 이곳에는 고 백남기 농민이 밀을 경작했던 마을입니다. 지난 2015년 11월이었죠. 서울 민중총궐기 때 경찰 살수차에 의해서 희생된 고 백남기 농민.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그의 삶의 가치와 또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 우리 후배 농민들 10여 명이 지난해 11월에 텃밭에 밀을 파종을 하셨대요. 오는 6월, 다음 달이네요, 이제. 밀 수확을 앞두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 밀 살리기 운동본부에 최강은 대표와 얘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최강은 (이하 최) - 네, 안녕하십니까?
◇ 빈 – 이제 며칠 이따가 수확을 하시겠네요, 그러면?
◆ 최 – 네, 그렇습니다. 밀은 보통 남부 지방 같은 경우는 10월 초에서 11월에 달에 파종을 해서 이듬해 6월 초, 중순에 수확을 하기 때문에 백남기 밀밭뿐만 아니라 전국의 밀밭이 선거 아마 지방 선거 끝나는 쯤 이렇게 해서 수확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빈 – 우리에게 밀이라는 게 좀 생소하게 느껴졌었는데, 어떤가요? 우리가 밀을 그 전에 과거에 많이 좀 생산을 했었나요?
◆ 최 – 그렇습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문헌에 보면 백제시대 때부터 밀이 재배는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밀 재배는 되어 있었다. 단지 이제 우리 식문화 자체는 쌀 문화이기 때문에. 유럽이나 서양처럼 밀보다는 쌀을 많이 먹기 때문에 밀은 잘 모르는 작물이기도 한데. 어차피 우리나라에서도 밀 재배 역사는 꽤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빈 – 네, 그러면 생육이라든가 작황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 최 – 네, 올해 다행히 현재까지는 작황이 아주 좋습니다. 전국적으로 파악을 한 바로도 예년에 비해서 올해 작황이 좋아서 수확이 조금 더 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는데. 농사라는 게 하느님이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또 모릅니다. 일주일, 이주일 사이에서 어떤 또 기후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빈 – 그중에 이제 고 백남기 농민의 밀밭이 있는 거예요.
◆ 최 – 네, 그렇습니다.
◇ 빈 – 주인이 없는 밀밭이 작황이 좋다고 하니까 마음이 좀 아픈데요. 후배 농민 여러분의 심정도 그러실 것 같습니다.
◆ 최 – 그렇습니다. 이 밀밭이 백남기 농민께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처음 시작했던 1989년, 90년대 초반부터 밀을 경작을 했습니다. 사실은 밀 6000평 정도 밭이 되는데요. 6000평 밭에서 사실은 밀 수확을 해서 작황이 아무리 좋아도 수확을 해도 경제적으로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이 밭을 끝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우리 밀을 살려야 한다는 그런 신념 하에서 밀밭을 지켜왔고 살려왔던 그런 밭이기 때문에 그래서 후배들이 이걸 놀리고 그냥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희들이 직접 나서서 짓게 됐습니다.
◇ 빈 – 6000평이면 작은 크기는 않은데 수확량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어떻게 유통할 수 있는 곳이 별로 없는 건가요, 소비처가 없는 건가요?
◆ 최 – 우리 밀이 많이, 많은 분들이 이제 알려지기도 하고 했습니다마는 그래도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통해서 사업을 하고 이렇게 진행을 한 지가 한 30여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판로는 썩 좋지는 않습니다마는 그래도 그런지 우리 밀을 즐겨 찾는 소비자 그룹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가치가 더욱 더 확산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 빈 –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우리 고 백남기 농민께서 우리 밀을 살리자고 하시면서 말씀하셨던 그런 철학이라든가 소신은 어떤 거였나요?
◆ 최 – 항상 백남기 농민께서 1980년대 초에 귀농을 하게 됐는데요. 귀농을 하고 나서 우리 농업, 농촌 또 농민들의 삶에 대한 그런 안타까움이 있어서 어떻게 보면 카톨릭 농민이라는 것을 통해서 농민 운동을 또 시작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젊었을 때 학생 운동, 청년운동을 통해서 감옥에 출소한 이후에 이제 귀농을 하게 돼서 또 결과적으로 농민운동을 통해서 이렇게 우리 사회 밀알이 됐던 그런 계기가 됐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빈 – 그렇게 본다면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어떻게 보면 중심에 계셨던 분이네요.
◆ 최 – 그렇습니다.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이 어차피 전국의 전남, 광주 전남 지역이 중심이기 때문에 그 중심에 우리 백남기 농민도 함께 지도자 역할을 하지 않았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 빈 – 보성군 부춘마을에다가 이 밀밭은 만들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 최 –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죠. 원래 이제 처음에 이제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시작할 때는 광주에서는 여기 삼도 지역, 또 전남에서는 구례 무안지역 또 고성, 이렇게 서너 군데 지역에 밀 씨를 어렵게 구해서 파종을 시작을 했는데요. 백남기 농민께서 처음에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주창을 해서 이제 했기 때문에 당연히 백남기 농민의 밀밭을 되살리게 되고. 이런 계기가 됐었는데요. 웅치면 부춘동이 아주 작은 시골마을입니다. 시골마을에서 1947년도에 백남기 농민께서 이제 태어나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광주로 유학을 와서 또 서울까지 이제 학교를 가게 돼서 다시 또 귀농을 고향으로 하게 된 그런 계기가 돼서 이제 보성으로 귀농을 하게 돼서 농민운동, 농촌운동, 이렇게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을 하게 됐는데요. 자연스럽게 그래서 보성에 백남기 농민이 사는 웅치면 부춘동 이 마을이 우리 밀 시발지가 되기도 한 그런 계기가 또 됐습니다.
◇ 빈 – 자연스럽게 그 곳이 됐군요. 들어보니까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께서도 유기농업에 많은 관심이 있으셨다고요?
◆ 최 – 네, 그렇습니다. 백남기 농민의 철학이 원래 당시 이제 군사독재 정권과의 왔었던 학생운동이나 청년운동 이후에도 이제 농민운동을 통해서도 드러났듯이 사실 그 당시에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을 때 카톨릭 농민은 생명운동 공동체 운동을 주창을 해서 또 다시 또 운동의 방향을 전환을 했거든요. 그 중심에 백남기 농민이 있었는데요. 애초에는 사실 백남기 농민은 군사독재 정권에 싸워서 더 투쟁을 더 해야 되지 않겠느냐 이런 원칙이 있었습니다마는 조직에서 결정을 그거는 전농이나 국농이나 이렇게 역할을 인물의 열할을 넘겨주고 간혹은 생명운동, 공동체운동 유기농 운동의 이제 시발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걸 집중해서 하자. 이런 차원에서 생명운동을 주창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 빈 – 밀농사를 단순한 밀농사로 볼 게 아니네요. 그러니까 우리의 밀을 살렸고. 또 우리가 주체가 됐고. 여러 가지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네요?
◆ 최 – 네, 그렇습니다.
◇ 빈 – 끝으로 우리 밀과 밀밭을 살리는 게 왜 중요한지 말씀해 주실까요?
◆ 최 - 유발 하라리라는 분이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중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역사상 처음으로 굶어죽는 사람보다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질병으로 죽는 사람보다는 나이 들어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고요. 범죄와 테러. 그리고 전쟁으로 죽는 사람을 합친 것보다 자살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하고 알카에다에 폭탄이 터져서 죽을 확률보다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폭식하고 죽을 확률이 1000배나 높아졌다고 이렇게 주장을 했는데요. 많은 유발 하라리 씨뿐만 아니라 미래학자들이 인류의 식량 문제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같이 이렇게 농업이 취약한 국가에서는 정말 되새겨야 할 부분이라고 보는데요. 우리 밀은 바로 그런 부분을 국민들이 촉발시키고 식량 자립을 위한 중요성, 그런 것들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사례가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 빈 – 알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최 – 네, 고맙습니다.
◇ 빈 – 지금까지 우리 밀 살리기 운동본부에 최강은 대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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