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현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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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현의 시선집중_외신이 바라본 80년 5월은?_임상훈 평론가_20180518

◇ 황동현 진행자(이하 황) - 38년 전 5월. 당시 우리 대한민국은 철저한 보도 통제 속에서 광주와 그 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이 땅 광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래서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요. 그때 우리 언론들은 정말 철저히 유린당했고 또 광주의 실상을 그래서 전 세계에 제대로 그리고 또 전국에 알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신들은 좀 달랐습니다. 그때의 외신의 시각으로 우리 광주를 보지 않았었다면 그리고 또 외신들이 우리 광주를 보도하지 않았었다면 우리 역사는 지금과는 어쩌면 좀 다른 모습. 또는 적어도 수십 년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5.18 특집으로 외신의 시각으로 보는 당시의 우리 사회 코너를 좀 마련해 봤습니다. 임상훈 국제문제평론가 연결돼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임상훈 (이하 임) - 네, 안녕하십니까? ◇ 황 – 네, 평론가께서는 38년 전 오늘 어디에 계셨습니까? ◆ 임 – 저는 그때 중학교 2학년으로 서울에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척들이 광주에 살고 계셔서 당시 상황을 기억을 하고 있는데요. 그 당시에 저희 이모님이 가족들을 광주에 남기고 혼자 서울에 올라오셨다가 사건이 발생됐었거든요. 그래서 당시 광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전화 연결돼 안 되고 물론. 가족들 생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며칠을 두려운 마음으로 보내셨던 거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몇 달 후에 저도 광주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MBC방송국 벽이 불타 있는 것도 직접 봤고. 광주에 있었던 친척 분들 증언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민들이 부당한 계엄령에 어떻게 저항했는지. 그리고 계엄군들이 광주시민들을 어떻게 짓밟았는지 당시 광주시민들의 한 맺힌 사연들 간접적으로나마 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당시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때 서울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순 세력에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알고 있었죠. ◇ 황 – 네, MBC방송국 저희 방송국이 불 타있는 벽을 봤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희들이 제대로 방송, 그때의 광주의 현실을 보도하지 못한 그 현실에 대해서 시민들이 또 분노했던 부분들. 굉장히 아픈 부분이고 부끄러운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제 기능을 굉장히 못 하고 있었던 바로 그때 진실을 세상에 알린 사람들은 또 외신기자들 아니었겠습니까?

◆ 임 – 네.

◇ 황 – 당시 광주의 실상, 외신을 통해서 해외는 어떤 식으로 보도가 됐었죠? ◆ 임 – 최근 얼마 전 영화로도 소개가 됐었죠. 그 당시 광주에서 벌어졌던 일이 독일 기자 힌츠 페터에 의해서 촬영이 돼서 전 세계에 전파되게 됐는데. 5월 22일 독일의 공영방송 ARD/ZDF라고 하는 방송이 있는데요. 여기서 타게스샤우라고 하는 독일에서 제일 오래된 저녁 뉴스입니다. 메인 뉴스인데. 여기에 이렇게 보도가 나왔습니다. 제가 요약해서 전해 드린다면 우리 취재진은 헬기를 통해서 광주로 진입했다. 군과 경찰이 이틀 동안 이곳에서 시위대가 가한 잔인함은 우리가 직접 목격한 중상자들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오랜 군사 기간 동안에 쌓인 국민들의 증오가 폭발하면서 2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약 3만 명이 직접 거리 전투에 나섰다. 계엄군의 양측의 충돌로 인해서 수요일까지 9명의 사망자에 이어서 6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보도를 했지만 대학생들이 말하는 숫자는 더 많다. 사망자가 수십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과장된 진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이 공식 집계보다 훨씬 진실에 가깝다. 시위대는 구속자 석방, 독재, 군사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고. 국민들은 완전히 시위대의 편이며 모든 주유소는 휘발유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황 – 그러니까 영화 택시운전사는 그 에피소드들도 실제 독일 TV에 똑같이 그렇게 보도가 됐었던 거네요? ◆ 임 – 네, 그렇죠. 저도 이번에 확인을 해봤습니다만 똑같이 보도가 되더랍니다. 보도 중에는 일부 군 병력은 시위대 편에 서서 명령에 불복종하고 있다는 그런 보도도, 내용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군대는 현 사태를 통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무기로 무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당일 날 보도에서 말을 하게 됐습니다. 1980년 5월 22일부터 독일 언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주요 외신들이 본격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보도하기 시작했는데요. 앞서 소개해드린 독일의 공영TV에서는 수십 명이 사망했다고 학생들이 밝히고 있다. 이렇게 말을 프랑스의 르몽드신문은 이미 22일 보도에서 광주에서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당시에 5월 22일자 르몽드 기사에서 계엄령이 선포된 지 3일째 되는 21일 광주에서 본격적인 저항이 시작이 됐다고 이렇게 전하고 있는데요. 당시 상황도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도시는 외부와 단절된 채 전화는 단절되고 도로는 차단됐으며 헬리콥터가 상공을 떠돌고 있다. 이렇게 당시 상황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 황 – 프랑스에서는 벌써 5월 22일에 100여 명이 사망했을 수도 있다고 지금 보도가 나왔던 거네요. ◆ 임 – 네, 그렇죠. 그러면서 기자가 병원을 방문해서 목격한 증언도 보도가 그대로 됐는데요. 모든 응급실은 부상자들로 가득 찼고. 중상자들로 많았다면서 기자의 눈으로 목격한 중상자만도 70명이 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쯤에 더 많은 수의 군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렇게 될 경우에 더 상황이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 신문은 전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그 다음 날 3일자 보도에서는 취재 기자가 광주 내부가 아닌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면서 밤새도록 자동소총 발사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화순 주민들의 증언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화순에서 기자가 탄 승용차가 수차례 광주 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광주 쪽에서 피신해 오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로막혔다, 그러면서 현지의 상황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요. 광주를 접근하는 모든 차량들을 향해서 군은 실탄을 발포했다. 이렇게 기자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당시 광주를 취재하고 보도한 기자가 누구냐면 지금까지 르몽드 도쿄 특파원이었던 필립 퐁스라고 하는 기자인데. 아직도 여전히 한국 관련 기사를 많이 쓰고 프랑스에서 몇 안 되는 한국 전문 언론인입니다. ◇ 황 – 네, 화순에서도 총소리가 들렸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최근에 또 이야기되는 너릿재 민간인 살상에 대한 진실 규명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부분과 또 맥을 같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 기사가 23일자 보도면 당시 묘사되고 있는 상황은 21일, 그리고 22일 상황들이었겠는데요. ◆ 임 –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기사에 따르면요. 20일 밤부터 본격적인 시민 봉기가 시작됐다. 이렇게 증언을 하고 있는데. 군의 발포도 그때부터 시작이 됐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그리고 21일 수요일부터 군용 차량, 그리고 유리 깨진 버스들이 시내를 일대를 돌아다니었고. 최루가스가 가득 거리를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시위대는 최루가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이 기사가 증언하고 있고요. 그리고 22일 새벽 3시에 광주가 시민군의 통제 하에 들어갔고 당시 시민군의 말을 인용을 해서 광주시민의 3분의 1이 봉기에 동참하고 있다,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이 주민들의 집 내부까지 들어가서 수색을 하고. 공수 부대 요원들이 모든 집을 들이닥치면서 수색을 펴서 여기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이미 19일 월요일부터 학생들 편에 서 있었다. 이렇게 이 신문이 증언하고 있고요. 한 상인의 말을 실었는데 기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이 군인들은 한국 전쟁 당시 공산당보다 잔인하다. 이렇게 울부짖듯이 말했다고 당시 상황이 이제 80년 5월 23일자였는데 그때 르몽드 신문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 황 – 상당히 구체적으로 현장들을 외신기자들이 취재를 했고. 또 광주시민들은 외신기자들에게 또 호의적으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보를 제공하고 그런 상황이었네요? ◆ 임 – 네, 그런데 그 기사내용으로 봐서는 외신기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당시 주민들이 언론, 일반에 대해서는 상당히 불신과 적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당시 기자의 취재는 두 젊은이가 트럭에서 내려서 같이 차에 올라타고 취재 활동을 함께 동참했다고 하는데.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에 걸쳐서 차량이 압수당할 뻔하거나 불에 탈 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기자는 대표적으로 주민들이 언론사들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면서 그것 때문에 언론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 기자는 느꼈던 것 같습니다. ◇ 황 – 실질적으로 한국의 언론들은 그때 광주의 상황을 전적으로 그렇게 통제돼 있었기 때문에 보도하고 있지 못했던 상황 아니겠습니까? ◆ 임 – 네. 그렇죠. ◇ 황 – 네, 그렇게 저항하던 시민군이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면서 광주시민들의 항쟁도 결국은 막을 내렸는데요. 그 이후에도 우리 언론들의 침묵은 계속됐고. 외신들의 보도만 이어졌죠? ◆ 임 – 네, 그렇죠.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하면서 도시도 이제 이들에 의해서 통제되기 시작을 했는데 그 이후 우리나라 정부에 알려진 대로 피해 상황을 축소하거나 은폐하기에 바빴고, 그런데 거기에 반해서 외신들은 이런 시민들의 봉기와 군에 의한 무력 진압이 역사에 묻힐 가능성을 우려하는 그런 모습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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