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
황동현의 시선집중_5 18 경찰 도움으로 목숨 건진 청소년의 증언_이정주 씨_20180515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최은영
■ 진행 황동현 PD
◇ 황동현 진행자(이하 황) - 5.18 당시 신군부의 강경 진압 지시를 거부하면서 광주 시민들의 안전과 목숨을 최대한 지키고자 했던 고 안병하 치안감. 그분의 이야기를 좀 계속 더 이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5.18 당시 진압군에 잡힌 뒤 생사가 갈린 그런 현장에서 경찰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당시 18세 소년 이정주 씨. 한참 후 본인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고 안병하 치안감의 지시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는데요.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들어보겠습니다. 오늘 이 사람, 이정주 광주시교육청 전문 경력관. 스튜디오에 직접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 이정주 (이하 이) - 네, 안녕하십니까?
◇ 황 - 지금 광주시에서 일을 하고 계시네요.
◆ 이 - 시교육청.
◇ 황 - 네, 광주시교육청에서요. 5.18 당시에 18살이셨는데. 그때 현장에 있게 된 그 상황부터 이야기 들어볼까요?
◆ 이 - 네, 저는 18살, 고2 나이였는데요. 사정상 학교는 못 다니고. 아버님이 운영하시는 조그만 인쇄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좀 아버님이 그 당시 신문을 5개를 구독을 하셨는데 신문을 보면서 사회 문제에 좀 관심을 갖게 되다 보니까 계엄이 선포되기 직전인 그 당시 실력자인 전두환 퇴진이나 김대중 석방 시에 그 전부터 참여를 했었습니다.
◇ 황 - 그래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고. 우리 사회가 지금 군사, 신군부들에 의해서 굉장히 부조리하게 흘러가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시위 현장에 참여하시게 된 상황이었네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그날 현장의 모습들이 지금도 생생하시겠습니다. 잠깐 소개해 주시죠.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 이 - 제가 계엄군에게 붙잡힌 날이 5월 20일 아마 오후 4, 5시쯤 된 걸로 기억이 됩니다. 그 당시에는 버스랑 택시들이 차량 시위에 나설 때로 기억이 됩니다. 시민들도 함께했었고요. 저 역시 친구 2명과 함께 금남로에 나가서 시위를 하다가 차량 시위 중인 택시에 탑승을 하게 됐었습니다. 그래서 택시 안에 친구랑 셋이 그리고 기사님이랑 네 사람이서 타고 있었는데. 한참 있다가 갑작스럽게 계엄군들이 유리창을 깨면서 진압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 황 - 그러면 경찰 진압이 아닌 계엄군, 군인의 진압에 의해서 군인들에게 잡히신 거네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 황 - 그래서 어디로 붙잡혀 가신 거죠?
◆ 이 - 그러니까 그 현장에서 잡힌 사람은, 제 친구 둘은 도망을 가고 저만 잡혔었는데. 광주 그러니까 지금 구 동구청 앞쯤에서 잡혀서 YMCA 앞으로 끌려갔었습니다.
◇ 황 - 끌려가서 거기에서 잡혀 계시다가 이렇게 굉장히 좀 위험한 순간, 어떻게 보면 생과 사가 갈릴 수 있는 그런 순간이셨는데.
◆ 이 - 네, 그렇습니다. 지금 보면 굉장히 극적인,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때 끌려갔던 YMCA 앞에 상당히 많은 숫자. 지금 기억하면 한 20여 명 이상이 됐던 걸로 기억이 납니다, 그 현장에서 잡힌 사람이. 잡혀서 YMCA 앞에서 군인들이랑 경찰들이랑 같이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을 붙잡아놓고 군인들이 아마 수송차량을 계속 요구를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잘 아시다시피 광주 시내에 시민들 시위가 상당히 격화가 됐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마 수송차량이 오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런데 제가 현장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경찰들이 자꾸 현장 지휘관, 계엄군 지휘관한테 자꾸 본인들한테 넘겨달라고 얘기를, 요청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처음 몇 번 얘기했을 때는 그걸 거절을 하더니 나중에는 아마 수송차량이 안 와서인지, 경찰들의 요구가 적극적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경찰 수송버스에 타게 됐죠.
◇ 황 - 결국은 수송차량이 왔으면 수송차량에 실려서 3부대나 이런 군부대로 갔으면 그때 고문 이런 과정을 겪으셨을 텐데. 다행히 경찰한테 인계되고 경찰들의 보호에 의해서 다시 풀려나시게 된 그 과정을 겪으신 건가요?
◆ 이 - 네, 그렇습니다.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하면 그 당시에 이제 군인들이 경찰들한테 넘겨주니까 그 경찰들이 지금 말하면 닭장차라고 그러죠. 닭장차에 싣고 동부경찰서 연병장으로 저희들을 데리고 갔었습니다. 동부경찰서에서 버스에서 내리라고도 하지 않고 계속 닭장차에 그대로 태워놓고 대기를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한참 시간이 흘러서 제가 오후 5시쯤에나 잡혔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그때 이동할 때는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두워졌을 때예요. 그런데 한 경찰 간부가 올라오더니 차량에 있는 커튼을 다 치라고 그러더라고요.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래서 차량에 있는 커튼을 치고 움직인 곳이 나중에 내려서 보니까 도경. 지금 도청 안에 있는 도경으로 저희들을 내려놓았습니다.
◇ 황 - 그리고 어떻게 그러면 풀려나셨어요?
◆ 이 - 그 당시에는 저녁, 20일 저녁에 거기 도착해서 잡혀 있었는데. 21일로 기억되죠, 아마. 그때 도청을 경찰도 그렇고. 군인도 그렇고. 아마 철수를 했을 때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저희들을 이렇게 가둬놓았던 공간에서 경찰들이 철수를 하면서 잠가놓았던 문을 열어놓고 철수를 한 것으로.
◇ 황 - 바로 그 부분이 지금 안병하 전 치안감의 지시에 의해서 잡혀 있었던 사람들, 시위대분들 이렇게 풀어줘라 하는 지시에 의해서 이렇게 풀려나실 수 있었다는 말씀이시네요?
◆ 이 - 지금 제가 겪었던 일들을 쭉 유추를 해 보면 YMCA 앞에서 경찰들이 본인들한테 넘겨달라고 할 때. 또 도경 회의실에 잡혀 있을 때 군인들이 와서 저희들한테 폭력을 행사를 하면 머리를 감싸고 벽에 머리 쪽을 대고 자기 몸을 보호할 수 있게도 해 주고. 제가 이제 제일 어린 나이었는데 저를 데려다가 본인들이 쉬는 간이침대 밑에 숨겨주고. 그리고 또 본인들이 철수하면서 문을 열어놓고 나갔다던 거,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유추를 해 보면 아마 경찰들이 그때부터. 저는 가장 아주 적극적으로 혜택을 입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황 - 결국은 시위대를 보호해야 된다는 그런 기본적인 정서. 그런 판단 속에서 시위대들이 보호되고 지금 이렇게 많은 분들이 살아나셨는데. 안병하 씨, 좀 전에 아드님 되시는 안호재 씨랑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그분들은 굉장히 또 나름 고통을 많이 겪고 계세요. 그분들의 가족은 만나보셨습니까?
◆ 이 - 네, 제가 방송에 나오게 된 계기도 안호재 선생님 때문에 안병하 씨 3남이시죠. 안호재 선생님 때문에 나오게 됐는데요. 한 2주 전에 우연히 도청, 지금 말하면 구 도청.
◇ 황 - 문화예술의 전당.
◆ 이 - 보전을 위한 힘든 싸움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들을 격려하러 오셨더라고요. 그 현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어떤 대화를 하다가 얘기를 듣게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했더니 굉장히 반가워하시면서 새로운 말씀이시라고 그러면서 본인을 좀 도와줄 것을 요청을 하셨고. 저도 그분한테 굉장히 고마움을 표시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황 - 어떻게 보면 그런 결정들. 안 치안감의 결정 때문에 다시 사셨다고 생각을 하고 계시는데. 지금 그 안 치안감 가족들은 광주시가 보상, 지금 이것을 다시 되돌려달라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서 이중고를 겪고 계시는데. 이런 문제가 좀 어떻게 풀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 -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안타깝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행정적 절차나 또 법률적인 문제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상당히 어려움으로, 어려운 일로 다가오고 계실 텐데요. 대승적 차원에서 이렇게 잘 풀리시고. 원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황 - 어떻게 보면 행정이라는 게 그런 행정의 형식보다는 우리들이 어떻게 인간적으로 해야 될 것인가. 좀 더 그런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면 해법이 쉽게 나오지 않을까 싶고요. 또 쉽게 꺼내놓기 쉽지 않은 그런 기억들을 이렇게 방송에 나와서 직접 나와서 꺼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이 - 네, 감사합니다.
◇ 황 - 지금까지 이정주 광주시교육청 전문 경력관과 함께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