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현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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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영화가 남긴 이야기_황호택 동아일보 전 논설주간_시선집중광주_20180129

◇ 황동현 진행자(이하 황) -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이 계속 화젠데요. 실제로 영화를 보고 이한열 열사를 참배하기 위해서 광주 망월동에 있는 민족민주열사 묘역을 찾는 분들이 전국에서 또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실제 있었던 그런 역사적 사건이었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인데요. 한 대학생의 죽음, 이를 부당하게 여긴 사람들의 폭로 그리고 군부의 탄압 속에서 6월 민주항쟁이 이루어지는 그런 과정들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런 영화입니다. 1987은 특히 독재 정권의 죄를 고발한 언론인들의 민주화를 위해서 자신들이 아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던 그런 사람들의 노력을 다루고 있는데요. 당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직접 보도하고 이후에 1987년을 정리해서 책을 내기도 했던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 주간 연결 돼 있습니다. 당시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주간님.

◆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 주간(이하 황) - 네 안녕하세요.

◇ 황 - 주간님. 영화 보셨습니까?

◆ 황 - 네. CJ 엔터테인먼트에서 시사회에서 초청을 해주셔서 봤습니다. 박종철 참사보도와 6월 항쟁이라는 책을 작년 초에 썼는데요. 이 책의 제작진이 영화 제작에 많이 참고를 했다고 해요. 이에 대한 사례로 시사회에 초대를 해줬습니다.

◇ 황 - 그 당시 직접 취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지고 또 시사회에서 영화를 직접 보셨을 때 그 느낌 감회가 남다르셨을 거 같아요. 어떤 느낌이셨습니까?

◆ 황 - 저는 현장에서 체험하고 겪은 사건들이고 영화에 나온 주역들은 상당히 현장에서 늘 상 만나던 사람들이라서 저로서는 감회가 남달랐는데요. 나이 들면 시시한 영화를 보고도 가끔 눈가가 촉촉해질 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여러 가지 제가 직접 뛰었던 현장을 다룬 영화고 그래서 제가 감동이 컸습니다. 일반 관객들과 달리 영화의 주역들은 늘 상 만나고 취재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영화에 나온 캐릭터와 비교를 해서 조금 저로서는 다른 관객들과 다른 감흥이 있었다고 할까요? 예를 들면 하정우씨가 공안부장역을 했죠. 실제로 조용조용하고 충청도 출신인데 말투도 느린 사람이예요. 하정우는 전화기를 집어던지고 소리 지르고 막 발진을 해서 영화 캐릭터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 황 - 그런 부분들 직접 현장에서 만났던 분들이 영화에서 캐릭터 되는 과정들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이신데요. 실질적으로 주간님 어떠셨습니까? 그 때가 30년 전이기 때문에 당시에 기자 초년병 시절이었을 거 같아요. 취재 당시 어려움이나 이런 부분들이 많이 있으셨을 거 같은데 그 이야기도 좀 해주시죠.

◆ 황 - 제가 기자 5년 차였습니다. 30대 초반이었는데 세상 경험도 부족하고 이럴 시기였죠. 당시는 엄청난 독재 정치권 치하였습니다. 언론의 자유도 없었죠. 말을 잘못하면 사법 형사들에게 노출 되서 정부기관이라든지 끌려가면 굉장히 엄청난 고문을 당했고 언론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던 시대였죠. 그런 시대 분위기에서 우리 기자들도 위축이 되어있었지만 그렇지만 빨리 민주화가 와야 된다. 국민이 갈증을 느끼는 민주화와 관련한 여러 가지 운동, 움직임에 대해서 우리는 늘 촉각을 세우고 보도하려고 노력하는 언론인들이 당시에도 많았습니다.

◇ 황 - 사회 분위기는 굉장히 억압적이었지만 그만큼 언론의 사명의식이 강했다는 말씀 아니시겠습니까?

◆ 황 - 네.

◇ 황 - 결국은 우리 황호택 주간 같은 분이 이렇게 기사를 쓰고 알리지 않았으면 진실은 묻혀버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었을 거 같아요.

◆ 황 - 네 그런 점도 있었죠. 당시에 이제 강민찬 치안 본부장이 박종철 군이 사망했다고 발표를 하면서 어떻게 경찰에 조사 받다가 22살 팔팔한 대학생이 죽었느냐고 기자들이 질문을 하니까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까 억하고 심장 쇼크를 받아 죽었다는 발표를 했어요. 말도 안 되는 22살 먹은 청년이 책상을 치니까 놀라서 죽습니까. 이 당시 박종철 군이 수사를 받았던 곳은 남영동 간첩 잡는 곳이었는데 여기에 끌려가서 1980년 광주사태를 전후해서 거기에 끌려간 사람들이 엄청난 고문, 물고문은 기본이고 전기고문도 당했습니다. 김근태 전의원 같은 분은 거기서 전기고문을 당해서 후유증을 앓다가 죽었죠.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남영동에서 조사받던 대학생이 죽었다. 고문치사를 직감했는데 경찰이 이런 거짓말을 하니까 믿지 못하고 계속 배후를 파게 된 거죠.

◇ 황 - 그리고 그 배후를 파는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후속 보도를 내게 되고 황호택 주간 중심으로 한 동아일보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거 아니겠습니까?

◆ 황 - 네. 예를 들면 경찰은 박종철 군의 시신이 고문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 가장 유력한 증거가 아닙니까? 이 시신을 화장을 하려했죠. 화장을 실패를 하고 결국 검찰이 법대로 집행을 해서 부검을 하게 됐는데요. 이 부검 현장의 유족대표로 박월길씨, 박종철군의 삼촌이 했습니다. 이 때 삼촌이 유족 고문 부검 현장에 하고 나와서 자기 박종철의 누나, 박은숙한테 종철이 시신을 보니까 온몸에 멍이 들었더라. 맞아 죽었더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기자들이 들어서 몰래 들었죠. 박종철이 고문치사다. 이런 거를 위한 기사를 쓰는 데 인용을 했고 또 경찰들이 박종철 군이 죽은 것을 모르고 소생술을 해보려고 쓰려져서 기절을 하니까 가까운 곳에 있는 중앙대 부속 용산 병원에 의사를 불렀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 한 거죠. 의사가 현장에 갔다 와서 기자들이 집요하게 물어보니까 동아일보 기자 물어보니까 바닥에 물기가 흥건하더라. 그리고 수사실에 욕조가 있더라. 물고문을 암시한 이런 것을 통해서 고문치사로 대학생이 죽은 것을 우리 저희 동아일보가 앞장서서 보도 할 수 있었습니다.

◇ 황 - 그 당시 정말 엄혹한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였고 독재정권 이렇게 기사를 쓰면서 기사님께서도 개인적인 두려움도 좀 있으셨을 거 같아요. 그런 부분들은 어떠셨습니까?

◆ 황 - 그러니까 주로 정권의 압박이라든가 이런 거는 편집국장이라든가. 사회부장, 정치부장 주요 부장들한테 왔습니다. 일선 기자들한테 압박을 취재현장에서 당시 실랑이를 할 때도 있었지만 압박은 주로 부장님들한테 왔는데 편집국장이나 사회부장들은 동아 일보 같은 경우 한국에 보도 지침을 위반하거나 때로는 노골적으로 위반하면 사우나탕으로 도망 당시에는 휴대전화가 없었을 때라 당국에서 아무리 찾아도 이 사람들을 찾을 수 없게 신문을 고칠 수 없게 도망을 갔고 또 당시에 사건기자들을 지시하는 강병수라는 기자가 있었는데요. 1월 19일차 신문을 12개면 중에서 6개 면을 박종철 군 기사를 도배를 하다시피 한 거죠. 당시에 민주화 실천 가족운동 협의 총무가 우리 신문을 받아보고 이걸 자기들이 지하 신문이 만든 찌라신 줄 알았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강근수씨가 기자시절에 이걸 보고 자기도 놀래서 도망 갔다하고는 그 때 붙잡혀 가면 엄청나게 고문을 당하니까 도망갈까 하고 전화를 해보니까 안 도망갔다.

◇ 황 - 그만큼 치열하게 언론이 독재 정부와 싸웠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런 의미에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사건 보도가 언론사가 갖고 있는 의미가 굉장히 클 거 같습니다.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그 부분은

◆ 황 - 그러니까 언론들이 그 때 상당히 위축 되어 있었지만은 저희 신문이 앞서 갔고요. 다른 신문들이 동아일보가 앞서 갔으면 한 걸음쯤 뒤따라오고 또 당국의 압박이 심하면 뒤로 물러갔다가 눈치를 봐서 앞으로 튀어나가고 이러면서 박종철 사건을 키워나갔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보도와 6월 항쟁을 일으키는 일이 됐죠. 국민들이 분노하게 됐고 이에서 결국은 우리나라에 민주화를 가져오는데 언론이 크게 역할을 했다고 영화에 장면이 상당히 많이 묘사되어 있죠.

◇ 황 - 영화에서 그런 부분이 정확하게 잘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요. 당시 이런 보도들을 하면서 과연 이게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랄지 그런 부분은 좀 있었나요?

◆ 황 - 제가 31살이었고 1981년에 기자가 됐습니다. 당시 실제로 5년 정도 기자였는데요. 전혀 예상을 못했죠. 우리는 1972년 유신체제 박정희 대통령이 김대중 후보와 치열한 접견 대선을 치루고 나서 대통령 선거를 없애버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체육관에서 모여서 99%의 찬성률로 대통령을 뽑던 시대에 엄청난 표현의 자유도 없었고 긴급조치도 언론의 자유도 없었던 그런 시대가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기 전까지 했는데 잠깐 민주주의 붐이 올까 했는데 1980년 518로 다시 폭압되기 독재정권 전두환 신 군부가 들어섰는데 유신체제 8년, 전두환 군부독재 7년. 15년을 그 치하에서 살다보니까 민주화를 갈망하고는 있었지만 민주화가 한 대학생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민주화 운동이 촉발 되서 실제 민주화가 이렇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 황 - 결국 그 중심에 기자정신이 있었고 또 우리 황호택 주간 같은 분들의 추진, 기사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제 또 원로 기자가 되셨는데 이렇게 언론의 역할 과연 언론들은 우리 사회를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짧게 한 말씀 해주시죠.

◆ 황 - 작년에 최순실 게이트와 촛불 시위가 보여주듯이 견제 받지 않고 감시 받지 않는 권력은 항상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6월 항쟁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고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실상을 국민에게 알려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사회가 존재하려면 건강한 언론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언론 환경이 너무 열악하고 어떻게 보면 언론이 생존에 급급한 그런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 국민들의 어떤 후원이나 격려, 관심 이런 것이 있어야하고 스스롤 노력하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황 - 다시 한 번 우리들이 어떻게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는 그런 아침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황 - 네 감사합니다.

◇ 황 - 지금까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직접 보도했던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 주간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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