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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인생의 오일팔9 - 박천만의 오일팔

김철원 기자 입력 2020-05-08 20:20:00 수정 2020-05-08 20:20:00 조회수 4

(앵커)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기
특별연중기획// 내인생의 오일팔,

오늘은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와 민주주의를 사수하기 위해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았다 계엄군에게 체포된
시민군// 박천만 씨의 오월을 들어봅니다.

김철원 기자입니다.

(기자)

계엄군이 폭도 소탕작전을 개시한
1980년 5월 27일 새벽 4시.

20살 시민군 박천만씨는
전남도청 민원실 2층 바닥,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진
바로 그 옆자리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계엄군을 향한 총의 방아쇠를
끝내 당기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박천만씨/5.18 시민군
"쏘기만 하면 분명히 계엄군을 맞힐 수 있었어요. 그런데 안 쐈어요. 만약 그 때 쐈으면 저는 트라우마 때문에 이후 온전히 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나는 죽기로 한 사람이니 그냥 죽자 그런 마음으로 쏘지 않았어요."

전남대 부근에서
아무 죄 없는 시민들에게
계엄군이 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목도한 다음부터
시민군으로서 총을 들게 됐다는 박천만씨.

계엄군이 곧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 남았습니다.

그 때 임신한 아내가 생각났지만
자리를 지켰습니다.

(인터뷰)박천만씨(60세)/5.18 시민군
"내일 계엄군들이 오면 죽을 수도 있다. 살고 싶으면 가시라 누군가 말하더라고요. 그 때 애기 엄마가 생각났어요. 임신해서 배가 이렇게 불러 있었거든요. 생각이 나더라고요. 하지만 어차피 죽기로 각오했기 때문에 계엄군들하고 싸우겠다 하고 도청에 남은 것이죠."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해
고막이 터지는 등 몸에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보다 더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한많은 40년 세월을 살아야 했습니다.

(인터뷰)박천만씨/5.18 시민군
"생계를 어떻게든지 해결해나가려고 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돼요. 왜냐하면 사람이 두려운 거예요. 사람을 보더라도 피하게 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자살도 생각했어요."

5.18이.. 광주가..한국 민주주의의 등대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는 그날 새벽 자신이 전남도청에 남았기 때문이라는 자부심이 이제야 생겼지만

아직도 5.18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합니다.

그럴 땐, 그 날 계엄군에게 생포됐을 때
도청 민원실 2층에서 1층으로 타고 내려온
가문비 나무를 찾아가 대화를 나눕니다.

(인터뷰)박천만씨(60세) 80년 5월 27일 계엄군에게 체포
"나무야 반갑다. 나무 너는 그때 일을 너는 잘 알고 있지? 나의 증인이고, 목격자고. 이 나무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죠."

5.18 40주년.. 박천만씨는 광주시민들에게 그 공을 돌립니다.

(인터뷰)박천만씨/5.18 시민군
(기자):"우리나라 민주화가 이만큼 될 수 있었던 데는 그 날 선생님께서 여기에서 총을 들고 광주를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말하기 전에, 우리 광주시민들이 한마음 하나가 됐기 때문에 광주가 이렇게 있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광주 시민들에게 진짜 큰 박수를 보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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