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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전 오늘 리포트5 - "누가 시민을 쏘았나?"

김철원 기자 입력 2013-05-21 20:06:36 수정 2013-05-21 20:06:36 조회수 13

(앵커)

33년 전 오늘은 5.18 열흘 동안의 최대 비극인 도청 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날입니다.

우리나라 군인들이 자국민을 상대로 총을 쏜 이 충격적 사건은 아직껏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김철원 앵커입니다.

(기자)

평일이었지만 부처님 오신날이라 쉬는 날이었던 수요일, 금남로엔 아침부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렸습니다. (1980.5.21.수요일.맑음. 낮최고기온 26.1도)

어림잡아 10만명의 군중들이 전날 밤샘시위에 이어 계엄군을 도청 쪽으로 압박했습니다.

그 자리엔 까까머리 고교생 강용주 군도 있었습니다.

강군은 계엄군도 우리 국민인데 땡볕에서 고생한다며 물을 떠다 줬습니다.

그 때가 오후 1시쯤, 물을 떠다주고 돌아서자마자 애국가가 도청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더니 집단발포가 시작됐습니다.

(인터뷰)강용주 광주트라우마센터장/(당시 동신고 3학년)
"무슨 애국가 소리? 하고 쳐다봤어요. 애국가 소리가 멈추자마자 총소리가 콩볶듯이 나는 거예요. 내가 물을 떠다준 군인이 시민들에게 발포했다는 거죠. 그 군인한테 물을 떠다준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사격은 10분 동안 계속됐습니다.

이 집단발포로 최소 30명 이상이 숨지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가 총을 쏘라고 명령했는 지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8년 청문회 때나 1996년 검찰조사 때 이 문제를 밝혀내려 애를 썼지만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발뺌했습니다.

(녹취)이해찬 당시 평민당 의원:"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발포명령을 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하셨죠. 어느 부대가 언제, 어디서 발포를 했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그와 같은 세부사항은 제가 파악할 수 없는 조그마한 말단 부대 사건입니다."

발포 직전, 발포명령의 존재를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 기자가 있습니다.

(인터뷰)나경택/당시 전남매일 사진기자
"발포명령 어떻게 됐나 그 소리를 내가 분명히 들었거든. 차 모 대위가 "발포명령 어떻게 됐나" 그러니까 통신병이 "아직 안 났습니다." 그런 순간에 내가 시계를 보니까 그 때가 12시 반은 지났고 그리고 10분 후에 그 통신병이 "발포명령입니다" 하니까 바로 그 때 (쏘기 시작했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와 주변 지역 경찰서와 관공서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시민군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인터뷰)김공휴/5.18 구속부상자회 부회장(당시 무장시민군)
"맨손인 상태의 사람들한테 총을 쏘고 죽이는데 이것을 무기를 들지 않는다면 저들한테 다 개죽음을 당할 수 있겠다."

시민들의 무장 저항에 맞닥뜨린 계엄군은 오후 5시를 기해 도청에서 철수합니다.

이 날은 시외 전화도 모두 끊긴 때라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영상취재 강성우
c.g. 오청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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