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비상계엄 언론검열을 뚫고 진실을 담다 나경택 기자의 5.18

주현정 기자 입력 2024-12-06 15:50:55 수정 2024-12-06 17:47:54 조회수 130

(앵커) 
그럼 여기서 비상계엄령 하에 언론 검열을 뚫고 5.18 광주의 참상을 취재한 나경택 기자를 스튜디오로 모셔 당시 상황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나경택 기자는 당시 전남매일 지금의 광주일보죠.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광주시민들의 저항과 고통을 기록했습니다. 
기자님 어서 오십시오.

-나경택: 
안녕하십니까?

(앵커) 
79년 이후 45년 만에 또다시 계엄령을 겪게 되셨습니다. 이번 사태 어떻게 보셨나요?

-나경택: 
끔찍하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시민정신이 지금 옛날하고는 틀리거든요. 그런데 이런 환경 속에 이 시대에 계엄령을 발표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앵커) 
기자님께서 활동하셨던 80년대 5.18 이전에도 계엄 상황이었다고 알고 있고 또 그때 당시 언론 통제가 굉장히 심했다고 들었는데 언론 검열관실이라는 곳까지 운영이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은 정확히 어떤 곳인가요?

-나경택: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당한 뒤로 계엄령이 발표가 되거든요. 그래서 그때부터 신문의 검열이 시작됐습니다. 방송이나 신문, 잡지 모두가 검열이 시작됐죠. 그 호남지방에 광주,전남 지방의 검열은 전남도청 2층 거기에서 검열을 했는데 검열관은 소령, 대위, 중위 그리고 보안대 상사, 사복을 입은 상사 이런 사람들이 검열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가져가서 여기에서 검열필 그리고 도장을 찍어주면 그 신문을 보도를 했었거든요. 그런데 제일 처음에 당시는 검열 때 이 기사를 빼 해서 빨간 줄로 이렇게 긋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공간을 그대로 해서 빈 공간을 두고 신문을 인쇄를 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다음부터는 기사를 채우라고 해서 발표한 대로 그대로 기사를 써가지고 그 신문을 발행하고 그랬었죠.

(앵커) 
그런 언론 검열 상황이 5.18 이후에 더 심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5.18 당시 상황은 어땠나요?

-나경택: 
그렇습니다. 5월 18일 일요일이었고 5월 19일 출근을 해서 저는 이제 금남로를 제일로 가서 전일빌딩에서 주로 취재를 했었는데 제일로 제가 19일 오전에 취재했던 것은 장갑차 뒤에서 공수부대가 젊은이를 곤봉으로 두들겨 팬 것입니다. 그 젊은이 옷 사이가 피투성이가 된 사이거든요. 그리고 바로 금남로에서 부부처럼 오는 부부들 남녀가 또 피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그 여자가 피를 흘리면서도 남자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주는 장면 이런 것을 취재를 해서 마감 시간 안에 그때는 석간 마감이 10시 반이었거든요. 오전 10시 반이었습니다. 그래서 들어와서 신문에 사용할 줄 알고 부랴부랴 인화를 해서 넘기고 데스크에 넘기고 했는데 검열 과정에서 사진은커녕 기사 한 줄도 못 썼습니다. 그런 신문을 보는 순간 광주시민이나 대학생들이 기자들도 잡으면 때려 죽이려고 했고 특히 사진을 찍는 사진 기자는 더 위험을 느꼈습니다.그런데 5.18 항쟁 그전에 경찰들이 망원렌즈로 시위대를 체증을 하거든요. 사진을 찍어요. 그래서 그 대학생이 다른 시위 장소에서 잡혀와서 사진을 대조해서 얼굴이 있으면 구속을 시켰거든요. 그러니까 광주시민이나 대학생들이 사진 찍힌 것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일빌딩에서 주로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 한 줄도 보도를 못 한 것. 그래서 저희들은 20일날 우리 기자들이 전부 보는 그대로 사진 취재하는 거 그대로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때는 이제 컴퓨터가 아니고 활자로 이렇게 신문을 제작을 하거든요. 그걸 이제 조판이라고 합니다. 간부가 그것을 알고 조판을 엎어버렸죠. 그때부터 이제 신문사는 휴간에 들어가고 기자들이나 공보계에 있는 사람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그리고 이제 저는 이제 결혼을 한 다음에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딸이 있었거든요. 저도 제 딸 때문에 집에 들어가고 싶죠. 
그러지만 광주 역사는 제손으로 기록해야겠다 그래가지고 건물에서 자면서 그렇게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앵커) 
방금 말씀해 주신 것처럼 광주 역사는 내 손으로 기록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해주셨다고 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사실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취재를 이어가셨습니다. 정확히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셨을까요?

-나경택: 
제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취재를 했는데 그것은 이 건물에서 자다 보니까 저녁에는 춥지 않습니까? 그리고 밥을 못 먹지 않습니까? 그때는 제가 몸도 컸고 좀 많이 먹을 때거든요. 그런데 며칠째 굶고 그러니까 춥고 배고픈 저한테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광주시민의 광주시민을 대신한 기자로서 광주의 역사는 내 손으로 기록이지 끝까지 기록을 했던 것입니다.

(앵커) 
그렇게 힘든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습니다. 모든 일을 겪어오신 선배로서 후배 언론인들에게 한말씀해 주신다면요?

-나경택: 
저 후배 언론인들 이번에 국회 보십시오. 국회에서 시민들 많은 시민들이 모여와가지고 그 특수부대 군인들을 못 들어가게끔 국회에 못 들어가게끔 막고 하는 거 보십시오. 그렇게 시민 정신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5.18 항쟁 때 그렇게 무자비했던 시민들을 두들겨 패고 총을 쏴서 죽였던 그 군인들의 모습이 이번 군인들한테는 제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5.18 항쟁에서 피해를 줬던 그 군인들 군인들이 나중에는 언젠가 추적을 당해서 벌을 받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 군인들은 그렇지 않았느냐 그렇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후배 기자들도 이번에 보면 상당히 열심히 뛰었고 또 옛날에는 광주는 SNS가 되지 않기 때문에 핸드폰도 없고 그래서 고립무원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테레비는 광주 폭도들이 있다. 그러니까 모든 광주를 제외한 다른 시도 사람들은 광주를 정말 폭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81년도에 소년체전이 강원도 춘천에서 열렸을 때 제가 취재를 갔었거든요. 그러니까 전라남도 광주시 아닙니까? 그 당시에는. 전남 모자를 쓰고 식당에 가면 광주 폭도 놈 때문에 이렇게 더울 때 소년체전한다고 소년체전은 항상 박정희 대통령 때 5월달에 했거든요. 그러니까 5.18 항쟁 때문에 7월 말쯤 했습니다. 그러니까 덥죠. 그런데 그렇게 속을 몰라주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취재했던 필름을 슬라이드 지금은 PPT가 있습니다마는 당시에는 환등기로 이렇게 볼 때입니다. 그래서 환등기 슬라이드로 제가 일부 만들어지고 그것을 이제 다음에 민주화 운동으로 명명이 된 1990년부터 제가 대학을 찾아다니고 딸은 부산이나 대구로 가서 사진전도 하고 이렇게 해서 5.18을 많이 알렸고 그랬습니다.

(앵커) 
정말 참담했던 역사의 한 순간에서 진실을 담기 위해서 노력해 주신 기자님께 제가 광주시민들을 대신해서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한 번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나경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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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정
주현정 doit85@kjmbc.co.kr

보도본부 뉴스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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