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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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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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라디오칼럼_첫 눈을 기다리는 마음_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이동 순 교수_20181207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20~08:57
■ 기획 김민호
■ 연출 황동현
■ 진행 김두식
■ 조선대학교 자유전공학부 이동순 교수

■ 첫 눈을 기다리는 마음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려앉는 밤,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온 동네가 눈 속에 파묻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음 날 아침을 기다렸던 나는, 무척이나 어렸지만 그 신비한 풍경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그날을 기다리는 것은, 순식간에 세상을 바꾸는 자연의 힘에 압도되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바로 눈 속으로 뛰어 들어 가고 싶어서도 아닌, 다만 꿈결 같은 그 아름다운 곡선에 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작은 지붕 지붕에 사뿐히 내려 앉아 서로를 감싸 안으며 껴안으며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드는 그 작은 하얀 것들의 따뜻함, 하얀 눈들이 만들어 놓은 티끌하나 없는 순수, 그것이었습니다.

아직 내리지 않은 첫눈을 기다리며 어린 날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를 만나고,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상으로 데리고 가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은 따수운 아랫목에 앉혀놓고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주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꺼내온 싱건지의 맛을 잊을 수 없기도 하지만, 저마다 다른 꿈을 꾸며 걸어온 길 저편에 하얀 눈이 그려놓은 세상처럼 우리의 삶이 하얀 눈이 그려놓은 부드러운 곡선이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내 유년의 한 자락과 함께 떠오르는 글이 한편 있는데 바로 「백설부」입니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抒情詩)는 백설(白雪),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니, 겨울이 익어가면 최초의 강설(降雪)에 의해서 멀고 먼 동경의 나라는 비로소 도회에까지 고요히 고요히 들어오는 것인데, 눈이 와서 도회가 잠시 문명의 구각(舊殼)을 탈(脫)하고 현란한 백의(白衣)를 갈아입을 때, 눈과 같이 온 이 넓고 힘세고 성스러운 나라 때문에 도회는 문뜩 얼마나 조용해지고 자그마해지고 정숙해지는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온 천하가 얼어붙어서 찬 돌과 같이도 딱딱한 겨울날의 한가운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은 아무 소리도 없이 한들한들 춤추며 내려오는 것인지, 비가 겨울이 되면 얼어서 눈으로 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백설부」는 목포에서 태어나 나주목사에서 자란 수필가 김진섭이 글입니다. 하얀 눈이 내리는 도시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설레임을 담은 이 수필에서도 하얀 눈은 ‘한없이 부드럽고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로 묘사되듯이 저에게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큰 눈이 내려주려기를 기도하고픈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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