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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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라디오칼럼_가을에 아낌없이 남기는 선물_조선대학교 강동완 총장_20181107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20~08:57
■ 기획 김민호
■ 연출 황동현
■ 진행 김두식
■ 조선대학교 강동완 총장

■ 가을에 아낌없이 남기는 선물

조선 성리학 6대가 중 한 사람인 호남의 거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선생을 기리는 제향에 초헌관으로 참석하기 위해 장성군 진원면에 있는 고산서원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아들과 함께 전사한 의병장 제봉 고경명선생과 더불어 호남이 자랑하는 노사 기정진선생은 성리학문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1862년에 삼정이 문란하고 삼남지방에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때 ‘임술의책’을 지었고,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병인소’를 지어 올려 위정척사를 외쳤습니다. 노사 기정진선생의 수많은 제자들인 유생들이 한말에 호남지역에서 다른 지역에 비해 의병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던 것은 노사 기정진 선생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도 한말 의병장이었습니다.

제향을 지내고 고산서원을 이리저리 들려보니 옛 선비의 향기가 가득하였습니다. 가을이 되어 서원 뒤의 감나무에는 까치감만 남아 있었습니다. 감나무의 감을 다 따지 않고 까치들이 가을 끝에 먹을 수 있도록 남겨둔 마음의 여유가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1961년 1월 20일 존 F. 케네디의 대통령 취임식에 “아낌없이 주는 선물”이라는 시를 낭송하였던 로버트 프로스트는 미국이 자랑하는 서정시인입니다. 그의 시에 가을에 낭송할 수 있는 "다 수확하지 않고" 라는 시가 있습니다. 담장 너머로 풍겨오는 잘 익은 향기 다니던 길 벗어나 무엇인가 가보았더니, 과연 사과나무 한 그루 여름의 짐을 편안히 내려놓고 잎사귀 몇 개만 남겨 놓은 채 여인의 부채처럼 가볍게 숨 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도 충분할 만큼 가을 사과는 풍작이었기에 땅에도 빨간 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안 거두어들인 무엇이 늘 있어 주었으면! 우리의 계획밖에 있는 게 더 많아졌으면, 사과든 무엇이든 잊어버린 채 남겨두어 그 향기를 맡는 게 죄가 안 되도록 하는 시입니다. 가을 수확의 날에 다 거두어들이지 않고 무엇인가를 남기는 인정이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살다보면 참 열심히 하였지만 우리가 다 계획한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인생을 다 쥐어짜면서 무슨 일을 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풍요로운 가을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면서 사과, 국화 향기를 남기고 있는 지금 우리네 인생들은 결실의 계절에 무슨 선물을 남길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끝까지 따지는 것 보다는 참고 인내하는 사람에게 사과나무 향기와 같은 것을 많이 더 남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올 가을은 가까운 시간에서부터 먼 세월에 이르기까지 내 자신에게 분노보다는 관용과 평화를 베풀어 줌으로써 고산서원에 있는 까치감의 여유나 프로스트의 “다 수확하지 않고” 라는 시와 같은 영감이 드는 계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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