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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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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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라디오칼럼_우리가 바라던 그 날_조선대학교 이동순 교수_20180815

■ 방송시간 월요일~금요일 AM 07:30~08:57
■ 기획 김민호
■ 연출 황동현
■ 진행 김두식
■ 이동순 조선대학교 교수

■ 우리가 바라던 그 날

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 뭉게뭉게 김이 서린다

고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톳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장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떼 노오란 장다리 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 밖에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엔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

여상현, 「봄날」, 해방기념시집, 중앙문화협회, 1945. 12.

'해방기념시집'에 실려 있는 여상현의 시, 「봄날」입니다. 해방을 격정인 감정으로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담담하게, 들판의 풍경을 담은 것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 화순의 풍경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해방은 겨울을 지나 이렇게 제 자리에서 제 모습으로 사는 것, 하늘과 땅과 바람과 햇살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연 만물조차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갇혀 살았던 동토의 땅에 우리가 고대하던 봄날, 그날이 온 것입니다.

오늘이 그 날인데, 오늘도 우리는 일상을 삽니다. 일제가 강탈한 조국을 되찾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이 목숨을 바쳤던 그 시간들, 그 숨결들을 잊은 채로 말입니다. 그날인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존심도, 영혼도 없이 일신의 안위만을 위해 내달렸던, 매국노들이 해방 조국의 정치 권력자가 되어, 건국의 아버지로, 반신반인으로,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것은, 그리고 독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은 오늘도 귀향하지 못한 채 망명지를 떠돌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아직도 미완의 그날입니다.

해방은 분명 우리에게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것으로 왔어야합니다. 그러나 강대국의 힘겨루기가 작동한 해방이요, 이데올로기로 반목하고 멸시하다 분단되고 만 해방이었습니다. 그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우리가 고대하고 고대했던 그날을 독립투사들의 마음으로 만들어간다면, 그날이야말로 진정한 광복의 날, 해방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때라야 납북되었던 시인 여상현도 고향 화순으로 돌아와 「봄날」을 다시 읊조리며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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