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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를 말할 수 있는 사람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8032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3월 23일 금요일
■ 이화경 소설가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
◆ 이화경 소설가 - 절기상 춘분인 날에는 진눈깨비가 하루 종일 내렸습니다. 봄이 온 줄 알았는데 느닷없는 눈발이 날려서 더 춥게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부터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 비극 작품 속의 한 인간이 떠올랐습니다. 그 인간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 나오는 리어입니다. 영국 브리튼의 늙은 왕 리어가 그토록 사랑했던 두 딸에게 배신당한 뒤 유일하게 자신을 지켜준 막내딸마저 잃고 비참하게 숨을 거둔다는 내용이 골자입니다. 여든 살에 접어든 리어 왕은 권력과 영토를 분할해서 딸들에게 미리 상속하고 힘든 국사마저 넘겨준 뒤에 딸들에게 의탁하며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겠다는 복안을 품습니다. 리어 왕은 영토를 분배하겠노라 말하면서 세 딸에게 일종의 사랑 시험인 러브 테스트를 행사합니다. 리어 왕의 무시무시한 비극은 상속의 대가로 딸들이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양적으로 보여주기를 요구했던 것에서 비롯됩니다. 그가 상상하고 있는 이상적인 노후생활은 두 딸의 배신으로 곧바로 괴로운 악몽으로 바뀌고, 그는 극심한 마음의 고통과 후회, 돌이킬 수 없는 회한과 광기에 휩싸입니다.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는 절규합니다. 작품에서 가장 유명하고 많이 회자되는 문장입니다.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있는 자들아, 너희들 가운데 나를 아는 자가 있느냐?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리어가 아니다. 아! 이게 생시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 왕의 질문에 광대는 ‘리어의 그림자죠’라고 응수합니다. 자신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했던 리어 왕이 극심한 절망의 심연에서 가까스로 던졌던 뼈아픈 질문은 오로지 그의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자신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회한의 순간에 통곡하고 맙니다. 왜 후회는 앞에 오지 않고 뒤에 오는 걸까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가장 믿었던 존재들에게 발등이 찍히고, 최선의 선의와 다정한 호의를 베풀었던 존재들에게 내침을 당하는 끔찍한 부조리와 모순을 ‘리어 왕’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도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고, 도저히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인간 리어 왕이 처한 실존적인 상황은 전율을 일으킵니다. 리어 왕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딸들의 사랑, 남들에게 행사하는 권력, 남들이 보여주는 경외심과 굴종 같은 외적인 것들로 방편을 삼았습니다. 삶의 근거를 지탱하는 외부적인 것들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을 때, 리어 왕의 삶은 단박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오직 한 명, 그를 가장 진심으로 사랑했던 막내 딸 코딜리어가 러브 테스트에서 사랑의 말을 재촉 받을 때 했던 토로가 어쩌면 비극 작품의 주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막내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낫씽(nothing)이라고 말이지요. 무, 아무 것도 없음, 할 말 없음이라고 말이지요. 춘삼월에 내리는 저 눈발처럼 인생도 젊음도 사랑도 가뭇없이 녹아내리리라는 걸, 리어 왕은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 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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