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광주MBC 라디오칼럼

07시 55분

다시듣기

눈물 차 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71220

■ 방송시간 월요일 - 금요일 AM 08:5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12월 20일 수요일
■ 이화경 소설가

■ 눈물 차

◆ 이화경 소설가 -
올빼미가 찬장에서 주전자를 꺼냈어요.
"오늘 밤에는 눈물 차를 마셔야겠어."하고 말했지요.
올빼미는 주전자를 무릎에 놓았어요.
"자, 이제 시작해야지."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올빼미는 아주 조용히 앉았어요.
올빼미는 슬픈 일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지요.
"다리 부러진 의자들."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올빼미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어요.
"부를 수 없는 노래들."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노래 말들을 잊고 말았거든."
올빼미는 울기 시작했어요.
커다란 눈물방울이 주전자 속으로 한 방울 두 방울 굴러 떨어졌지요.
"난로 뒤에 떨어져서 그 뒤로 다시는 못 본 숟갈들."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더욱 많은 눈물이 주전자 속으로 떨어졌어요.
"읽을 수 없는 책들."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책에서 몇 장이 찢어졌거든."
"멈춘 시계들."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가까이에 태엽을 감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
올빼미는 울었습니다.
커다란 눈물이 방울방울 주전자 속으로 굴러 떨어졌지요.
"모두들 보지 않는 아침들." 하면서 올빼미는 흐느꼈어요.
"접시 위에 있는 으깬 감자." 하면서 올빼미는 울었어요.
"아무도 으깬 감자를 먹고 싶어 하지 않았거든.
“또 쓰기에 너무 짧은 연필들."
올빼미는 슬픈 것들을 또 생각했어요.
올빼미는 울고 또 울었지요.
곧 주전자가 눈물로 가득 찼어요.
"자, 이제 됐구나." 하고 올빼미는 말했어요.
올빼미는 울음을 그쳤어요.
올빼미는 주전자를 난로 위에 얹어 놓고 끓기를 기다렸어요.
컵에 차를 따랐을 때
올빼미는 행복한 기분이 들었어요.
"차 맛이 좀 짭조롬한 걸. 하지만 눈물 차는 언제나 최고란 말이야."
하고 올빼미는 말했답니다.

방금 읽어드린 이야기는 아놀드 로벨이라는 작가가 쓴 ‘눈물 차’라는 제목의 동화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제 후배가 최근에 가장 감동적으로 읽은 책이라며 제게 한 권을 선물했습니다. 어른인 제게 동화책을 선물한 후배가 참 근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눈물의 맛을 제대로 아는 올빼미라니. 인생, 아니 올빼미생을 좀 아는 것 같아서 한번쯤 만나서 함께 눈물 차를 마셔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눈물이 주는 위안을 카타르시스라고 하던가요? 감정의 상처를 밖으로 표출해 안정된 상태를 되찾는 뜻의 카타르시스.
2017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요. 저는 집에 있는 빈 주전자를 앞에 놓고 올 한 해 동안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일과 사람과 세상을 만나면서 부딪치고 겪고 당했던 일들을 말입니다. 제 안에 꼭꼭 숨겨두고, 억누르고, 모른 체하고, 고개 돌렸던 감정들을 차분히 꺼내서 주전자에 한 방울 한 방울, 눈물들로 채운 뒤에 마셔볼까 합니다.
차를 끓이려면 촛불이 필요하니까, 먼저 초를 사두어야겠습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남겨주세요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깨끗한 댓글 환경에 동참해 주세요.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