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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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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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70605

■ 방송시간 월요일 - 금요일 AM 07:53-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6월 5일 월요일
■ 이화경 소설가

■ 그늘

◆ 이화경 소설가 -

그늘이란 말 아세요?
맺고 풀리는 첩첩 열두 소리 마당
한의 때깔을 벗고 나면
그늘을 친다고 하네요
개미라는 말 아세요?
좋은 일 궂은 일 모래알로 다 씻기고
오늘은 남도 잔치 마당 모두들 소반에 둘러앉아
맛을 즐기며
개미가 쏠쏠하다고 하네요.
순채*라는 말 아세요?
물 속에 띠를 늘이고 사는 환상의 풀
모세혈관의 피를 맑게 거르는 ……
솔찮이라는 말 아세요?
마음 외로운 날 들로 산으로 바장이며
나물바구니에 솔찮이 쌓이던 나숭개 봄나물들……
그러고도 쑥국과 냉이 진달래 보릿닢 홍어앳국……
벌천**이란 말 아세요?
시집온 지 사흘 벌써부터 기러기 고기를 먹고 왔는지
깜빡깜빡 그릇을 깨기만 하는 이웃집 새댁……
사는 재미도 오밀조밀 맛도 아기자기
산 굽굽, 물 굽굽 휘어지는 남도 칠백 리
다 우리 씀씀이 넉넉한 품새에서
그늘을 치고 온 말들이에요.

방금 읽어드린 시는 송수권 시인의 '그늘'이라는 제목의 전문입니다. 부제로는 개미입니다. 개미……. 우리 전라도에서는 ‘개미’를 최고의 음식 맛으로 칩니다. 입 안에 착착 앵기는 감칠맛이 나고 영혼까지 위로하는 웅숭깊은 맛이 느껴질 때, ‘개미 있다’라고 표현하지요. 궂은 일 겪으면서 마음이 지쳐갈 때, 관계가 모래알처럼 서걱거리면서 눈물 나게 외로울 때, 보릿닢을 솔찮이 넣은 뜨건 홍어앳국을 들이키면 속이 풀릴 것 같지 않습니까?
자신의 시의 표준어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늘 강조해왔던 송수권 시인은 인생사 맺고 풀리는 우여곡절의 그늘을 치고 온 말들이야말로 품새가 넉넉한 시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요즈음 혼술, 혼밥, 혼놀, 혼숙이라는 말이 자주 들려옵니다. 1인 가구, 1인 소비자 시대로 접어들면서 혼자 술 마시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있는 테이블에서 혼자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식당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누구 눈치 보지 않고 혼자 맛있게 먹는 것도 좋지만 어쩐지 적적하게 느껴지는 건 제가 나이 먹은 탓일까요.
“아가, 아가, 체하련 숭늉부터 마셔라/해설풋 새참 때도 다 지났건는디/얼마나 배고팠냐?/홉빡 묵어라, 홉빡” 따숩게 말해주며 밥상 곁에 함께 해주는 사람이 있는 풍경이 사라지는 게 아쉬운 건 제가 옛날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송수권 시인도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다’라고 쓴 걸 보니, ‘모두들 소반에 둘러앉아 맛을’ 즐길 때 진정으로 개미가 쏠쏠하다고 쓴 걸 보니, 밥은 함께 먹어야 제 맛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다정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개미 있는 음식을 함께 잡수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래볼랍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 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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