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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 이기는 불행_이화경 소설가_라디오칼럼_20170330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3월 30일 목요일
■ 이화경 소설가
■ 게임에서 이기는 불행
◆ 이화경 소설가 -
금장 시계를 찬 불행
타야 할 기차가 있는 불행
모든 것을 생각하는 불행
..................................
그리고 거의
'거의' 틀림없이 게임에서 이기는 불행이 있다.
방금 읽어드린 시의 구절은 프랑스 시인인 자크 프레베르의 ‘거의’라는 시의 한 대목입니다. 그는 이브 몽땅이 불러서 유명해진 ‘고엽’이라는 노래의 작사가이기도 합니다. 느닷없이 먼 나라 시인의 시 한 대목을 읽어드린 이유는 최근에 제가 겪은 일 때문입니다.
2004년 12월 17일에 저는‘거의 틀림없이 게임에서 이기는 불행」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집을 낸 적이 있습니다. 출판사는 '자작나무숲'이었습니다. 80년대에 같은 대학에 다녔던 후배는 광주 용봉동 자취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가 몇몇 출판사를 전전하며 편집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저와 후배는 모든 일에 '거의 틀림없이 게임에서 지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의 이름으로 묶을 책 한 권은 절실히 필요했던 때였습니다. 후배는 출판사를 차려서라도 선배인 저의 책을 내주겠노라 말하곤 했습니다.
후배는 자작나무를 좋아했습니다. 저희는 아름드리 자작나무가 겁나게 많은 숲을 상상하며 출판사 이름을 자작나무숲이라 지었습니다. 13년 전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우리는 출판 게임에서 거의 틀림없이 이기는 엄청난 불행을 마구마구 기대했음에 틀림없습니다. 80년 광주와 그 이후를 주로 다룬 소설들을 묶어서 218쪽 분량의 소설집을 2004년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에 출간했습니다.
소설집은 어디에서도 주목하지 않았고, 남아 있던 몇 십 권의 책은 한 달 전에 분리수거함에 버렸고, 몇 권은 바랜 채로 구석에 쌓여 있습니다. '거의' 틀림없이 잊혀진 소설집에 대해 기자들로부터 엊그제 전화를 몇 통 받았습니다. 자작나무숲 출판사와 무슨 관련이 있냐 혹은 없냐는 질문이 통화의 첫 문장이었습니다.
이순자씨가 최근에 회고록을 냈는데, 공교롭게도 출판사 이름이 '자작나무숲' 이었다, 라는 걸 저도 신문 기사를 보고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두환씨의 아들인 전재국이 시공사라는 출판사를 갖고 있는데 왜 하필 자작나무숲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다시 차려서 이순자씨의 회고록을 낸 걸까, 몹시 불쾌하고 당혹스러웠습니다.
13년에 13년을 더한 과거에 후배와 저는 대학 캠퍼스에서 전두환 살인마를 처단하겠노라 다짐하며 최루탄을 뒤집어쓴 채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그런데 결국 처단하지 못한 탓에, 이순자씨가 자신들이 518의 억울한 희생자라는 해괴하고 후안무치한 말을 지껄이는 더러운 책을 마주하고야 말았습니다. 5·18 희생자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고 자신들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기는 커녕 역겨운 기만으로 가득한 책이 후배와 제가 지은 출판사의 이름으로 귀환한 걸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을 느낍니다. 그들이 부디 불행하기를, 틀림없이 불행해서 역사의 죗값을 혹독히 치르기를 빌고 또 빌어봅니다.
◇ 진행자 - 이화경 작가는 소설 인문 에세이 번역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있습니다. 제비꽃 서민 소설상, 현진건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 꾼, 나비를 태우는 가 그리고 인문 에세이 버지니아 울프와 밤을 세다 등 다수의 작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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