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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뒤의 슬픔_강용 학사농장 대표_라디오칼럼_20170322
■ 기획 윤행석
■ 연출 황동현
■ 작가 박현주
■ 3월 22일 수요일
■ 강용 학사농장 대표
■ 아름다움 뒤의 슬픔
◆ 강용 학사농장 대표 - 1990년 우연한 기회로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때는 한중간의 수교가 되기 전이고 적성국가로 분류되어 방문하기위해서는 어떤 기관에서 진행하는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직항이 없어 다른 나라를 경유해야만 갈 수 있었습니다.
묘한 긴장감 속에 처음 도착한 북경은 상상보다 훨씬 자유스럽게 보였고, 많은 자전거와 지금보다 훨씬 더 전통적이었던 중국의 모습들이 참 인상적이었고, 만리장성과 서태우가 재건했다는 이화원이라는 정원의 규모는 역시 큰 나라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만큼 넓어 보이는 호수와 태어나 처음 보는 크기의 웅장한 건축물들과 가이드가 설명해주던 하나하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로 이화원은 참 기억에 남는 정원 이었습니다.
몇일 전 북경 출장길에 시간을 내어 26년만에 이화원을 다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 된 이화원의 모습을 보면서 만약 이 정원이 없었다면 중국과 우리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1764년 행궁을 개축하여 완성한 이화원은 아편전쟁 등으로 서양 열강들에 의해 수많은 수탈을 당했고, 1886년 당시 막강한 권력이었던 서태후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재건하였습니다.
그런데 서태후가 재건할 당시 주변 상황은 동아시아 패권과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러시아 일본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심각한 대립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4개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 북양함대의 규모와 우수한 무기들은 동양최대의 함대로 불리기도 하였고, 북양함대 하나의 규모가 당시 일본전체 해군력과 비슷할 정도였으며, 기울어가던 청왕조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런데 1894년 조선의 동학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청일전쟁에서 동양 최대의 북양함대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던 일본의 함대에 무참히 참패 했습니다.
참패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중 가장 놀라운 이유는 이 큰 함대가 겨우 몇발의 포탄과 자갈 모래가 든 연습용 포탄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포탄이 없어 빈 군함으로 일본과 싸우고 있던 그때 서태후는 엄청난 예산을 쏱아부어 생일잔치를 하고 있었고, 다음날 청나라는 대련부터 일본에 함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태후는 해군의 예산을 전용하여 생일잔치를 하였고, 저 아름다운 이화원을 개축하였답니다.
일본의 승리로 끝난 청일전쟁 후 엄청난 배상금까지 받은 일본은 결국 조선을 점령하였고 우리는 그 많은 고통의 역사 때문에 지금까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서태후의 전용에 대해 일부 오해라는 설도 있고, 다른 나라 때문에 우리가 식민 지배를 당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 얽혀있는 한중일의 역사인지라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어디서나 지도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진행자 - 학사농장 강용 대표였습니다. 강용 대표는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하는 학사 농장 유기농 협동조합을 이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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