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MBC 라디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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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9일 “망년회라는 이름의 약속” <김성민 전남대학교 소아정형외과 교수>

 거리에서는 캐롤이 들려오고, 커다란 트리마다 불이 하나둘 밝혀집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크리스마스 시즌이 왔구나.”

 

 한 해를 보내는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구세군의 종소리입니다. 남을 돕는다는 의미를 담고 울리는 이 종소리를 들을 때면 저는 자연스럽게 지난 한 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종소리는 마치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올해,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며 이 종소리를 듣고 있나요?”

 

 저는 소아정형외과 의사이자 종양정형외과 의사로서 부모가 없는 아이들, 시설에서 자라는 아이들, 혼자 걷기 힘들어 재활실을 오가는 아이들,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무게를 먼저 배워야 했던 아이들을 만납니다. 이 아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남을 돌아본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의사로서 의료 봉사를 나가 아이들과 어른들의 신체검진을 하고, 치료가 필요한 곳은 없는지 살피며 의료 물품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같은 단체 안에서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모습으로 마음을 보탭니다.어떤 분들은 미용 봉사를 꾸준히 이어오고 계시고, 어떤 분들은 멀리서 작은 후원금으로 힘을 보탭니다. TV나 세탁기 같은 생활 가전을 전달하는 손길도 있고, 고기를 굽고 음식을 차려함께 식사하는 시간을 만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조용히 나르는 손길도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저는 깨닫습니다. 남을 돌아보는 일에는 정해진 방법이 없다는 것.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요.

 

 그렇게 봉사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문득 이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먼저 보기 전에, 어느새 제가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언가를 해주었다는 만족감 때문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제 마음이 먼저 따뜻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이들이 그 존재만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망년회나 송년회도 본래는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한 해를 흘려보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한 시간 말입니다. 어쩌면 망년회란 서로를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약속의 대상은 꼭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만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시설에 있다는 이유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 아이들이 혼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12월에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조용히 전하고 싶습니다. 올 한 해도 정말 고생 많았다고, 너희는 혼자 버텨온 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많은 이들이 너희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12월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잊지 말자.” 이 계절만큼은 조금 더 많은 시선이 남을 돌아보는 쪽으로 향하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망년회라는 이름으로 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장 따뜻한 약속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