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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7일 "스 승" <정희남 대담미술관장>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중 어떤 분은 지식을, 어떤 분은 삶의 태도를, 또 어떤 분은 행동으로 가르쳐주셨죠. 그런 분들이 바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요즈음 부쩍 교사들의 자살과 교권에 대한 뉴스가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지며 유년 시절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50여가구가 어울려 사는 농촌 마을입니다. 그야말로 앞산과 뒷산에 장대를 걸치면 빨래를 널어도 될만큼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그때는 동네주민 누구나 그랬지만 저 또한 많은 형제와 넉넉잖은 살림으로 우린 늘 먹는 것에 허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1년에 한번 닭, 돼지를 잡고 진수성찬인 교자상을 차려 1~6학년까지 6분의 선생님과 교장, 교감 선생님을 초대하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그 상 앞에 얼씬 거리지도 못하였고 혹시나 먹고싶어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선생님께서 떠나고 나중에 혼이 나곤 하였습니다. 식사 끝나고 귀가하시는 선생님들의 손에는 늘 볏단으로 엮어만든 10개의 계란이 들려있었습니다. 우리집뿐만 아니라 앞집, 옆집, 뒷집 모두 자기네 집에서 제일 귀한 곶감, 홍시, 날계란, 삶은 밤 등을 자녀 손에 들려 선생님께 보내드리는 것을 보며 자라왔습니다.
모든 것이 당연했고 또 그때는 그 선생님들을 몹시 부러워 선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교사들의 인성교육이나 정서훈련마저도 입시공부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사들의 관심어린 충고나 훈육마저도 학부모들의 지나친 관심과 관여 때문에 오히려 주어진 업무만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까지 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버지는 스승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는 자기 아버지보다 스승을 더욱 중히 여긴다 합니다. 아버지와 스승이 동시에 감옥에 있을 때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자식은 스승을 먼저 구해야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대에서는 지식을 전하는 스승을 누구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부모님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재능과 기질을 발견하고 나를 인정해주고 북돋아주는 스승도 많습니다. 그 스승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와 훗날 그 스승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제자도 많습니다.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혼돈스럽더라도 우리들의 최후의 보루는 그래도 가정과 학교가 아닐까 합니다. 스승이 무너진 사회는 결국 공동체가 무너지는 사회입니다. 우리가 다시 스승의 자리를 회복하지 않는다면, 미래세대는 존경과 배움의 가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게 될지도 모릅니다. 스승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교권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존중과 신뢰의 문화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