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 의견

보도 자료 - 보성 회령포성(會寧浦城) 1500년 잠들다 등록일 : 2022-03-29 00:44

안녕하십니까?

야생화 사진가 정양진(丁洋辰)입니다.

전남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봉서동(鳳棲洞) 마을은 ’압해정씨‘ 집성촌으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터전을 버리지 않고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살아오고 있습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보성정씨고택‘에서 2백 미터 떨어진 산 중턱에 1500여 년 전 삼국시대 때 축성된 허물어진 돌성, 회령포성(會寧浦城)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어르신들로부터 회령포성(會寧浦城)은 ”정유재란 때 조선군과 왜군이 활로 쌈을 했단다“는 구전만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 돌성의 축성 시기나 목적 등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공직을 정년으로 마치고 들꽃 탐사(探寫)에 집중하던 중, 5년 전부터 ’회령포성‘에 관한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 한성백제박물관, 국회도서관, 고려대학교박물관, 국토지리원. 종로박물관 등을 들어 다니며 자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지지, 이순신 장군의 해전 기록, 반곡 정경달 장군(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의 임진왜란 육전 기록을 뒤져봤습니다. 또 신문에 보도되었던 기사를 통해 회령포성(會寧浦城) 실체에 접근하게 됩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이기봉 학예연구사는”이 성은 삼국시대 때 축성된 돌성으로 조선 시대 성보다 훨씬 튼튼하게 잘 쌓았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튼튼하게 쌓은 돌성이 왜 허물어졌을까요?“라는 질문에, 몽골의 고려 침입 때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골족은 기마민족으로 해전이나 산악전에 취약하여 고려의 산성 구축을 두려워한 나머지 허물도록 했을 것입니다.

1500여 년을 숲속에 잠들어 있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복원하여 후세에 물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10 6213 2527  http://blog.daum.net/11-4570-430

야생화 사진가 정양진 올림


- 참고 자료

* 회령포성 자료 - 1

- 한국매일 뉴스(2015년 9월 14일 南道 정자기행(2448)-보성 회령포성(會寧浦城) 지금의 전남 보성군 회천면은 회령포(會寧浦)가 있는 회령현(會寧縣)의 고을이었다.

신라 무주 보성군 대로현(代勞縣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이 고려때 회령현으로 고쳐 장성부의 속현으로 삼았다.

조선시대 회령면(會寧面)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 천포리 일대를 합하여 지금의 회천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령포(會寧浦)는 당시에 장흥(長興)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편에 장녕성(長寧城) 곧 읍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백 4자, 높이가 8자이며, 안에 샘이 17개, 못이 3개가 있다. 장흥의 장(長)과 수령의 녕(寧)의 두 글자를 따서 성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4)이 쓴 기문에 있다. 장흥(長興) 회령포영(會寧浦營) 부의 남쪽 72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 회령포영 부의 남쪽 72리에 있다.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뒀다고 적고 있다. 일월록에 "처음에 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단기로 달려서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하니 그때는 바로 새로 패전한 뒤인지라 전선과 기계가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도중에 경상 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다만 8척 뿐이었고 또 녹도(鹿島)에서 전함 한 척을 얻었다.

배설이, “지금은 일이 급하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서 호남 군진에 의탁하여 싸움에 조력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았다.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순신이 전라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를 불러서 전함을 수습하게 하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함께 왕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생사를 같이 해야 될 것이다.

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까워 하겠는가, 다만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이다.” 하였다.

연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7권 "고 전하고 있다.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7권 "고 전하고 있다.

- 전남일보(2016년 11월 25일 이순신의 마지막 육상 회합 / 진지 구축 장소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를 지나 전일와 접경지 4부 능선에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숲으로 가려져 온전히 남아 있다. 이를 보성사람들은 약자로 ‘회령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에 ‘거북머리 같다’고 하여 귀두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보성 회령포성은 이순신의 마지막 육상에서 회합 장소이고 유진 장소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었다.

오늘날 남문 터 출입구 부분에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자랐다. 산록 4부 능선에 자리한 성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하단부는 1미터가 넘는 큰 돌로 쌓고, 30~50센티 크기의 돌로 자연석 막돌 쌓기로 되어 있다. 조선 수군들이 수시로 모여 회합하는 곳이 회령이다.


회령포성 자료 – 2

보성 회령은 백제시대에는 마사량현이라 하였으며 당시 읍치 보성 회령리에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에는 복홀군이 되었다. 그 후 대로현으로 바뀌면서 보성군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 대로현이 회령현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군사거점으로 자리한 것은 1457년(세종3)에 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이다. 구미에 영성이 신설되면서 군사 수비처로 이름을 날렸다.

1910년까지 회령은 민역조에 군수품과 전쟁에 관련된 화살, 화약, 과녁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령 제100조에 의한 행정구역 변경으로 1932년 3월 회령면과 천포면을 합하여 회천면으로 개칭하였다.

오늘날 보성군 회천면에는 회령 옛 이름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보건진료소, 농협, 삼거리 길, 노인회관, 마을 이름 등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옛 회령성이 온전히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멀리 명교 율포, 시장, 도당, 내래, 외래, 봉서, 신근, 군학 까지 보성만 해안 조망이 가능하다.

이 회령포성은 정유재란 기간 중 이순신 장군의 비밀 식량창고였다. 보성 회령성은 군사물자를 비축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1597년 8월 17일 이순신은 이곳에 와서 군사물자를 확인하였다. 그가 옮겨두었던 군량을 가져가기 위해서 이다.

이 회령포성 초입에는 오늘날 흔적으로 천연기념물 제480호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팽나무 숲이 비보림이 되어 500년 세월을 견디고 있다. 이 비보림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의 출입을 적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군관들과 함께 심었다는 유래가 전해 진다.

보성만은 보성어민들과 회천면 봉강리, 전일리, 벽교리 일대의 해상 진출로였다. 그 중에서도 회천면 군학마을 앞 군학 항구는 수심이 깊어 조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시 배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 조선 수군에게는 최적이었다.

보성 회령포성은 군사물자를 비축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수지역 목초지가 있는 백사정, 군대 훈련 망대가 있는 망파장, 선소가 있는 휘리와 군영이 있는 구미를 거느린 수비처 군학 마을 등으로 이루어진 거진이었다.

정유년 보성에서 수군 재건활동을 전개한 이순신 장군이 보성 열선루에서 임금에 ‘상유십이금신전선’ 장계를 보내고 서둘러 해상으로 진출하기 위해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은 당시에 군사물자를 예비로 비축하고 적군들의 침입을 전방에서 미리 타격하자는 의견이 개진되어 장소를 이진하여 군사를 전진 배치하게 된다.

‘회령진지고적조’를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후 회령포성은 예비 군수품 기지로 남기고 이 회령포성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해상 전진 기지를 남진하여 새롭게 건설하였다. 사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곳 오늘날 봉강리와 전일리 4부 능선에 자리한 회령포성을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배설의 약속된 시간에 이곳에 오지 못한 것이다.


  1. * 회령포성 자료 - 1
  2. - 한국매일 뉴스(2015년 9월 14일 南道 정자기행(2448)-보성 회령포성(會寧浦城) 지금의 전남 보성군 회천면은 회령포(會寧浦)가 있는 회령현(會寧縣)의 고을이었다.
  3. 신라 무주 보성군 대로현(代勞縣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이 고려때 회령현으로 고쳐 장성부의 속현으로 삼았다.
  4. 조선시대 회령면(會寧面)으로 존재하다가 1914년 천포리 일대를 합하여 지금의 회천면으로 이어지고 있다. 회령포(會寧浦)는 당시에 장흥(長興)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7권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편에 장녕성(長寧城) 곧 읍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9백 4자, 높이가 8자이며, 안에 샘이 17개, 못이 3개가 있다.
  5. 장흥의 장(長)과 수령의 녕(寧)의 두 글자를 따서 성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6. 조선 전기의 문신 경재(敬齋) 하연(河演, 1376~1454)이 쓴 기문에 있다.
  7. 장흥(長興) 회령포영(會寧浦營) 부의 남쪽 72리에 있는데, 석성이다.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
  8. 회령포영 부의 남쪽 72리에 있다.
  9.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을 뒀다고 적고 있다.
  10. 일월록에 "처음에 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단기로 달려서 회령포(會寧浦)에 도착하니 그때는 바로 새로 패전한 뒤인지라 전선과 기계가 전혀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11. 도중에 경상 수사 배설을 만났는데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다만 8척 뿐이었고 또 녹도(鹿島)에서 전함 한 척을 얻었다. 배설이, “지금은 일이 급하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서 호남 군진에 의탁하여 싸움에 조력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았다.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12. 순신이 전라 우수사 김억추(金億秋)를 불러서 전함을 수습하게 하고 약속하기를, “우리들이 함께 왕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생사를 같이 해야 될 것이다.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 한 번 죽는 것을 아까워 하겠는가, 다만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광일 것이다.” 하였다.
  13.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17권 "고 전하고 있다.
  14. - 전남일보(2016년 11월 25일 이순신의 마지막 육상 회합 / 진지 구축 장소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를 지나 전일와 접경지 4부 능선에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숲으로 가려져 온전히 남아 있다.
  15. 이를 보성사람들은 약자로 ‘회령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에 ‘거북머리 같다’고 하여 귀두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16. 보성 회령포성은 이순신의 마지막 육상에서 회합 장소이고 유진 장소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60자,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었다.
  17. 오늘날 남문 터 출입구 부분에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자랐다.
  18. 산록 4부 능선에 자리한 성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하단부는 1미터가 넘는 큰 돌로 쌓고, 30~50센티 크기의 돌로 자연석 막돌 쌓기로 되어 있다.
  19. 조선 수군들이 수시로 모여 회합하는 곳이 회령이다.

  20. 회령포성 자료 – 2
  21. 보성 회령은 백제시대에는 마사량현이라 하였으며 당시 읍치 보성 회령리에 있었다.
  22. 통일신라시대 에는 복홀군이 되었다. 그 후 대로현으로 바뀌면서 보성군에 소속되었다. 고려시대 대로현이 회령현으로 바뀌었다.
  23. 이곳이 군사거점으로 자리한 것은 1457년(세종3)에 수군만호진이 개설되면서이다. 구미에 영성이 신설되면서 군사 수비처로 이름을 날렸다.
  24. 1910년까지 회령은 민역조에 군수품과 전쟁에 관련된 화살, 화약, 과녁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25. 1931년 조선총독부령 제100조에 의한 행정구역 변경으로 1932년 3월 회령면과 천포면을 합하여 회천면으로 개칭하였다.
  26. 오늘날 보성군 회천면에는 회령 옛 이름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보건진료소, 농협, 삼거리 길, 노인회관, 마을 이름 등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옛 회령성이 온전히 그대로 자리하고 있다.
  27. 이곳에서는 멀리 명교 율포, 시장, 도당, 내래, 외래, 봉서, 신근, 군학 까지 보성만 해안 조망이 가능하다. 이 회령포성은 정유재란 기간 중 이순신 장군의 비밀 식량창고였다. 보성 회령성은 군사물자를 비축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28. 1597년 8월 17일 이순신은 이곳에 와서 군사물자를 확인하였다. 그가 옮겨두었던 군량을 가져가기 위해서 이다. 이 회령포성 초입에는 오늘날 흔적으로 천연기념물 제480호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팽나무 숲이 비보림이 되어 500년 세월을 견디고 있다.
  29. 이 비보림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군사들의 출입을 적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군관들과 함께 심었다는 유래가 전해 진다.
  30. 보성만은 보성어민들과 회천면 봉강리, 전일리, 벽교리 일대의 해상 진출로였다. 그 중에서도 회천면 군학마을 앞 군학 항구는 수심이 깊어 조수 영향을 받지 않고 항시 배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 조선 수군에게는 최적이었다.
  31. 보성 회령포성은 군사물자를 비축하고 군사를 훈련하는 기수지역 목초지가 있는 백사정, 군대 훈련 망대가 있는 망파장, 선소가 있는 휘리와 군영이 있는 구미를 거느린 수비처 군학 마을 등으로 이루어진 거진이었다.
  32. 정유년 보성에서 수군 재건활동을 전개한 이순신 장군이 보성 열선루에서 임금에 ‘상유십이금신전선’ 장계를 보내고 서둘러 해상으로 진출하기 위해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은 당시에 군사물자를 예비로 비축하고 적군들의 침입을 전방에서 미리 타격하자는 의견이 개진되어 장소를 이진하여 군사를 전진 배치하게 된다.
  33. ‘회령진지고적조’를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후 회령포성은 예비 군수품 기지로 남기고 이 회령포성의 이름을 그대로 차용한 해상 전진 기지를 남진하여 새롭게 건설하였다. 사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곳 오늘날 봉강리와 전일리 4부 능선에 자리한 회령포성을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배설의 약속된 시간에 이곳에 오지 못한 것이다.

회령포성 자료 - 3  /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기록

1597년 8월 18일 이순신 장군은 육상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바다로 나왔다.

보성사람들이 이순신장군을 돕기 위해 속속 모여들었다. 출발이 늦어졌다.

군학항구에는 수천척의 어선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 크기가 대선과 같은 향선 10척을 선별하여 출항하기로 하였다.

정씨가문, 변씨가문, 김씨가문 모두가 나섰다. 정경달의 아우 정경명, 정경영, 정경준, 정명열, 마하수 부자, 백진남, 문위세와 문영개 부자, 임영개, 변홍달 등과 3500여명에 이르는 보성의병들이 앞장섰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유적명 : 회령포성(會寧浦城)

구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봉서동

지정사항:지정사항없음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유적.

건조물-성곽 유적설명 봉서동 바로 뒤, 해발 626m의 일림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능선이 평탄하게 끝나는 부분에 석축이 축조되어 있다.

지금은 많이 허물어져 있지만 원래의 높이는 4∼5m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산되고 전체둘레는 거의 2km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성 내부에는 기와편과 질그릇 조각이 산포되어 있고 위치나 규모로 보아 대단히 중요한 성으로 추정되는데 문헌기록에 보이는 회령포성(會寧浦城)이거나 회령포성과 관련된 성으로 판단된다.


참고사항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 전라남도, 1986,

<<문화유적총람>> ; 임영진, 1992, <보성군의 고고학유적>,

<<보성군 문화유적 학술조사>>




댓글(1)
  • 2022-03-31 11:34

    제보해주신 내용은 프로그램과 뉴스 담당자에게 전달했습니다.
    취재 여부는 해당 부서에서 판단하게 되며, 필요 시 별도 연락이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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