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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스페셜5.18뉴스

내인생의 오일팔23 - 차명숙의 오일팔

(앵커)
5.18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들여다보는
광주mbc 5.18 40주년 연중기획
<내인생의 오일팔>입니다.


 


오늘은 40년 전 광주시내에서
가두방송 마이크를 잡았던
차명숙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김철원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기자)


 


40년 전 오월, 광주에는 언론이 없었습니다.


신문기자들은 펜을 꺾었고 방송사는 계엄군 발표만을 보도하는 데 그쳤기 때문에 시민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습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양재학원에 다니던 19살 학원생 차명숙씨가 가두방송 마이크를 들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터뷰)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  ‘방송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방송국이’    ‘신문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고 있다’   ‘우리 확성기로 이 사실을 알리자’ ‘방송국 가서 요구하자’ 그렇게 시작이 된 겁니다. "


 


1980년 5월 20일 오후부터 도청앞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 아침까지 차를 타고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확성기로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인터뷰)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1980년 5월 20일 새벽에 그때는 간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광주를 지킵시다” “도청 앞으로 아침 7시까지 모여주세요.”하고 호소를 한 거죠."


 


하지만 도청 앞 집단발포로 수십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고 차씨는 계엄당국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담양이 고향이고 광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차씨는 혹독한 고문에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으로 조작되고 말았고, 이런 누명 때문에 출소하고 나서도 광주를 떠나야 했습니다.


 


가두방송 마이크를 잡았다는 이유로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은 차씨는 그러나 이후 경북 안동에서 홍어를 파는 식당을 운영하며 대구경북 지역민들에게 오월 광주의 가치를 알리는 활동으로 자신의 아픔을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뷰)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제가 기억이 없어지지 않는 한 진실을 밝히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지만 도청 앞 집단발포 때 희생된 광주시민들이 자신의 가두방송을 듣고 금남로에 나왔다 변을 당했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아직도 차씨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인터뷰)차명숙 5.18 당시 가두방송
"5월 21일 아침 7시까지 ‘도청 앞으로 오세요’ 호소하지 않고 오후 1시까지 있지 않았다면 좀 덜 다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서 돌아가신 분들에게 정말 미안하죠. 죄송하고."


 


반성도 않고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학살책임자 전두환의 인생과 가두방송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차명숙씨의 인생을 비교해보면 '인간의 양심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김철원
광주MBC 취재기자
시사보도본부 시사팀장
"힘있는 자에게 엄정하게 힘없는 이들에게는 다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