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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수는 없지만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은 없이 자랐던것 같습니다.
제가 목포교대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 당시에 추첨을 통해서 입학을 하였는데. 강당에서 커다란 상자안에서 파란색 공을 빼내어서 학교입학이 되자 아버지는 저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으니 그분의 교육열도 상당하셨나봐요
세상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던 그 시절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제게 침 깜찍한 욕심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성탄절전야에 교회에서 나눠주는 과자를 꼭 받아서 챙기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8살이 되던 그 해에 크리스마스 전날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는데요
저녁밥을 일찍 챙겨먹고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지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안으로 찾아 들어간 저는 무슨 과자를 주시려나 하는 호기심에 목사님의 말씀도 성가대의 노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려서 얻었던 과자들이 지금은 우습게도 별것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제겐 왜 그렇게도 대단하게만 여겨졌을까요?
고작 캔디 몇개하고 손가락에 끼울 크기의 튀밥과자 몇개였는데요
그 눈보라속의 찬바람을 맞아가며 찾아갈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만큼 제 마음이 여리고 순수해서 가능했나 봅니다.
그 날 과자를 받아서 의기양양해서 나오는데 늦게 교회에 도착한 같은 학교 친구 하나가 문앞에 서있었어요
무척이나 추워 보였는데 자세히보니 혼자가 아니고 동생을 데리고 있더군요
친구가 교회안을 아쉬워하며 기웃거리는 동안 그 동생아이는 제 손에 들린 과자를 거의 울듯하며 바라보는데 차마 그냥 올수가 없었어요
절대로 내밀고 싶지 않았지만 웬지 그렇게 성스러운 날 전야에는 선행을 베풀어야 할 것 같아서 눈 딱 감고 캔디 하나 튀밥 과자 하나만 남기고 죄다 친구와 그 동생에게 나눠주고 돌아오는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까운 생각이 들던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있습니다.
학교에 등교하는 아이의 몸에서 생선냄새가 심하게 풍기곤 하던 아이였는데 학교친구들은 그것을 트집잡아서 그 친구를 놀리곤 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친구 집안이 많이 어려웠었나봐요
가끔 그 친구는 절 봤지만 별다르게 아는체를 안해서 그날의 과자사건은 잊고 설을 맞이하던 날 아침이었어요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려서 나가봤더니 그 친구가 서있어요
문밖으로 나서자 그 친구는 제 손에 뭔가를 쥐어주고 부리나케 가버리는 겁니다.
집에 들어서서 열어봤더니 쑥향기가 가득한 절편이었어요
제 엄마는 저희들이 잘 안 먹는다고 하얀떡만을 해주셨는데 제가 태어나서 처음 본 쑥떡이었지요
엄마는 "쌀보다 쑥이 더 많이 들어갔구나...몸에 좋으니 남기지 밀고 다 먹어..."하시며 다른 말씀을 안하셨어요
입에 넣어보니 왜 그렇게 거친맛이 느껴지는지 뱉어내고 싶었지만 엄마 눈이 무서워서 참고서 삼키고 또 삼켰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그리운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땐 친구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왜 그런 떡을 가져다 주었나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신학기가 되면서 전 광주로 이사를 와버려서 그 친구를 다시는 보질 못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에게 떡을 잘먹었다는 얘기도 못했고요
근데 왜일까요?
나이가 들면서 가끔씩 그 친구가 무척이나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 과자를 받은 답례로 떡이 만들어지던 설날 아침에 부랴부랴 제 집을 향해서 뛰었을 그 친구를 생각하면 왜 고맙다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었나 하는 후회감으로 마음이 너무 아파오곤 합니다.
지금도 목포에서 살고 있는지 결혼해서 아이는 몇인지..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을때가 있곤 합니다.
너무도 깨끗한 마음을 가진 아이였는데 그 마음을 알아보지 못한 제가 너무 밉기도 하고요
이름이 은경이였습니다.
자꾸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고 보고 싶은건 과거가 그립다는것이고 과거의 시간속에서 자꾸 달콤한 추억을 만들어내는 제가 늙어간다는 것 맞죠?
아무튼 너무 보고싶고 그립습니다...
그 시간들이 그리고 그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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