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현의 시선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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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인터뷰]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영산강 고대 역사의 비밀의 열쇠(전남대학교 임영진 교수)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특별전시가 한창입니다.


함평 신덕고분은

일본의 무덤인 ‘전방후원분’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고분이 국내에서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15기 정도 확인되면서,

고분의 주인공과 축조 배경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들이 제시돼 왔습니다.


이번 함평 신덕고분 특별전을 계기로

이와 같은 고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전남대학교 임영진 교수,

스튜디오에 직접 모셨습니다.


/인사/


1. ‘함평 신덕고분’ 명칭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고 가겠습니다.

   전방후원분이라고도 하고 또 장고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동일한 고분을 다르게 부르는 이유가 있는지?

• 함평 신덕고분은 앞은 네모나고 뒤는 둥근 형태를 가진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상통하는 무덤인데 한국에서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 사이에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15기 정도가 축조되었음.

• 당시 전남지역 마한 고분은 방형 혹은 원형 분구에 옹관이 들어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함평 신덕고분과 같은 무덤들은 마한 고분과 계통이 다르기 때문에 그 주인공과 축조배경에 대해 많은 관심이 주어지고 있음.

• 특히 이와같은 고분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하여 유행한 것으로서 일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용어 그대로 전방후원분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차이도 있기 때문에 구분해야 한다는 학자들이 많음.


2.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 구조나 출토유물에서 차이가 있고 분포상태에서도 차이가 있음.

• 특히 역사적 성격에서 차이가 큼

• 세계 학계에서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일본 고대 야마토 시대에 야마토 영토 안에서 유행하였던 일본 고유의 무덤으로 규정되어 있음

• 만약 우리가 전방후원분이라는 일본 용어를 그대로 적용한다면 국제적으로 영산강유역이 야마토의 영토에 해당한다는 인식을 줄 수 있음

• 최근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전방후원분이 분포된 지역은 국가간의 경계가 형성되기 이전에 큐슈(九州)에서 확장하였던 지역으로 본다는 견해가 나왔는데 이는 야마토 정권의 영토가 영산강유역까지 걸쳐 있다고 보고 싶은 심중을 드러낸 것임

• 당시 영산강유역의 모든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에 일본과 같이 전방후원분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은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임

• 일본에서도 이 고분을 전방후원분이라 부르면 이 지역을 왜의 영역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전방후원형분으로 부르자는 학자도 있음.


3. 일본과는 다른 명칭을 사용할 필요성은 명확한데,

   어떤 명칭이 바람직한지?

• 연구자에 따라 전방후원형고분・전방후원형분・장고형고분・장고분 등 다양한 명칭을 쓰고 있음

• 저는 이와같은 고분들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이것이 고분인지 모른 채 겉으로 보면 단순한 구릉 같으면서도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서 장고산, 장고봉, 장고촌 등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봄

• 그래서 현지에서 부르는 명칭을 종합해서 長鼓墳이라 부르고 있고, 광주 월계동 장고분이 대표적임


4. 본격적으로 장고분에 대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한국 장고분의 주인공과 축조배경을 많이들 궁금해하시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봐야 할 점이 있다고?

• 가장 먼저 분포 상태를 알아야 함.

• 장고분은 전북 고창지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에 1-2기씩 총 15기 분포.

  나주를 중심으로한 마한 옹관묘 집중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음.

  중심지에서 반경 20~40㎞ 사이에는 영암 태간리 자라봉고분, 함평 마산리 표산고분, 광주 명화동고분, 광주 요기동 조산고분이 있음.

  반경 40~60㎞ 범위에는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함평 장년리 장고산고분, 광주 월계동 1・2호분이 있음.

  반경 60㎞를 벗어난 지역에는 영산강 상류 담양, 전남 서북부 고창・영광, 서남부 해남에 분포함.

• 장고분이 당시 이 지역 마한의 중심지를 벗어난 외곽지대에 1-2기 정도씩 분포하는 것은 그 주인공의 역사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음.


5. 장고분 주인공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는

   나중에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하고,

   그 이전에 먼저 밝혀야 할 점이 또 있다면?

• 장고분에서 사용된 매장주체부의 구조가 중요함.

• 장고분의 매장주체시설은 영암 자라봉고분만 석곽이고, 나머지는 모두 출입시설이 부가된 석실인데 벽돌을 사용한 백제 무령왕릉과 구조적으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음.

• 그동안 전남지역에서 확인된 석실은 모두 백제 석실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지만 입지・석실위치・구조・장축방향・출토유물 등 여러 속성에 따라 영산강식, 남해안식, 백제식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됨.

• 장고분에서 확인된 석실은 영산강식에 해당하는데 영산강식은 강이나 하천을 끼고 있는 낮은 구릉 위에 단독으로 분포하고, 석실과 분구의 규모가 크고, 석실이 분구의 중간에 위치하는 특징이 있음.


6. 석실도 종류가 다양한데,

   종류에 따라 사용된 시기가 다른지?

• 영산강식이 이르고 백제식은 늦습니다. 영산강식은 일본 큐슈 석실과 유사한데 큐슈 석실은 다시 북큐슈식과 히고식으로 구분되고 영산강식 석실도 1식과 2식으로 세분됨.

• 영산강식 석실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나주 복암리 3호분의 96석실인데 5세기 4/4분기에 해당하고 장고분으로는 광주 월계동 1호분 석실과 상통함.

• 가장 늦은 것은 해남 용두리 장고분, 장성 영천리고분, 화순 천덕리 3호분 등인데 그 시기는 6세기 2/4분기에 해당함.


7. 장고분의 주인공과 축조배경을 밝히기 위해서는

   출토되는 유물도 중요하겠지요?

• 출토유물은 크게 토기, 목기, 금속기, 구슬 등으로 구분됨

• 토기로는 분주토기가 중요한데 장고분의 분정이나 분구 자락에 열을 이루고 배치되는 특수한 토기임.

• 목기는 분주토기와 함께 사용된 분구 장식용품임.

• 금속기는 금동관이 중요한데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 금동관과 비슷하고 백제나 신라 금동관과는 다름. 장식을 한 대도는 일본제로 추정되는 꼰환두대도가 있음.

• 구슬들은 마한의 유리구슬이 많지만 금박 유리구슬이나 연리문 유리구슬은 동남아시아와 관련된 것임.


8. 이어서 장고분의 주인공과 축조배경에 대해 살펴볼 텐데,

   여기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한국의 장고분은 지금까지 전북 고창지역을 포함한 전남 서부지역에서 15기가 알려져 있는데 이 지역은 지석묘에 이어 마한 분구묘의 밀집권을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역사적 동질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장고분의 피장자와 축조배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함.

• 장고분의 피장자와 축조배경에 대해 그동안 발표되었던 견해는 매우 다양한데 크게 토착마한인설, 일본파견왜인설, 백제파견왜인설, 망명왜인설 네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음.


9. 네 가지 설을 하나씩 설명해 주신다면?

• 토착마한세력자설은 영산강유역권 외곽에 자리잡고 있었던 토착세력자들이 남하하는 백제의 압박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왜와 교류하면서 도입하였다고 보는 견해임. 당시 백제의 영산강유역권 병합 기도에 대응하는 현지 토착세력의 자구책으로 보고 많은 연구자들이 상정하였던 견해임.

• 백제파견왜인설은 백제의 공주 천도 이후 영산강유역권의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왜계 백제관료가 축조하였다는 견해임. 이 견해는 199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던 토착세력자설이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자 제기되었던 대안임. 광주 월계동 장고분에서 출토된 분주목기가 기나이(畿內) 출토품과 통한다는 점에서 기나이 지역으로 이주하였던 마한인들이 동성왕의 귀국시 귀향하여 영산강유역에 배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왜에서 활동하던 곤지의 추종세력들이 귀국하여 왕・후로 파견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

• 일본파견왜인설은 영산강유역과 일본열도 사이에 교역을 비롯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왜인이라는 견해임.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지역을 국가간의 경계가 형성되기 이전 시기에 큐슈에서 확장하였던 세력의 경계지역으로 본 견해도 여기에 속함.

• 망명왜인설은 장고분의 분포 상황에 주목하고 일본열도의 정세 변화 속에서 더 이상 거주하기 어려운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망명해 온 것으로 본 견해임. 그 망명지가 영산강유역권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왜인이라 하더라도 영산강유역을 비롯한 광의의 마한권에 뿌리를 둔 마한계 왜인일 것으로 보았음. 이 견해를 귀향설이라고 표현하는 연구자도 있지만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님. 귀향설은 왜로 이주한 사람들이 당대에 다시 돌아온 것을 말하기 때문에 마한에서 이주하여 수백년이 지나고 이미 왜인이 된 사람들이 망명한 것이라는 망명왜인설과는 다른 것임.


10. 여러가지 학설들을 들어 보면

    각각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장고분의 주인공이 각각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인물들인지?

• 이 네 가지 견해는 각각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논문으로 발표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보면 해결되기 어려운 다른 문제점이 생기기 때문에 가장 문제점이 없는, 약한 견해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임.

• 첫째, 토착마한세력자설은 영산강유역권 외곽지대의 토착세력자들이 백제의 압박 속에서 왜와의 교류를 통해 이를 극복해 보고자 도입하였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 견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전방후원분이 도입되기 전에 그러한 무덤을 쓸 수 있는 역량을 가진 토착세력이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임. 그러나 대부분의 장고분들은 단독분 위주로 존재할 뿐 현지에서 그 이전에 해당하는 고분군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현지 토착세력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음.

• 둘째, 일본파견왜인설은 영산강유역과 왜 사이에 교역을 비롯한 특별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왜인이라는 견해인데, 만약 왜에서 그러한 역할을 하는 집단이 영산강유역권에 들어와 있었다면 영산강유역권에 못지 않게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던 다른 지역에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야 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함. 설사 영산강유역권에만 들어와 있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시대에 왜인을 위해 동래에 설치되었던 왜관이나, 1636년 일본을 왕래하는 포르투갈인들을 위해 설치되었던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를 보듯이 일본에서 들어온 왜인들이 교역에 편리한 일정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였어야 할 것이지만 장고분들은 내륙 오지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분산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임. 게다가 장고분이 축조되었던 지역을 국가간의 경계가 형성되기 이전 시기에 큐슈에서 확장하였던 경계지역으로 본 견해는 당시 이 지역을 누구라도 먼저 장악하면 영역화할 수 있는 지역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납득하기 어려움.

• 셋째, 백제파견왜인설은 백제가 영산강유역권 토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왜계 백제관료가 축조하였다는 견해임. 그러나 왜계 백제관료가 주로 활동하였던 백제 중심지에서는 소규모 횡혈묘만 조사되고 있을 뿐 장고분과 같은 대형 고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과 영산강유역권에서도 장고분들이 중심지역을 제외한 외곽지역에 단독분 위주로 산재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임. 왜계 백제관료라면 백제를 위해 활동하더라도 생활의 근거지는 일본이기 때문에 활동이 끝나면 귀국하였을 것이고 예기치 못한 사망시에도 귀장하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무덤은 일본에서 찾는 것이 순리일 것임.

• 넷째, 일본망명왜인설은 일본열도의 정세 변화 속에서 망명해 온 왜인이라는 견해인데 그 망명지가 영산강유역권에 국한되어 있는 점이 문제이지만 이 문제만 해명하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음. 망명왜인설의 핵심 내용은 3세기말경부터 백제에 밀린 마한 세력이 큐슈 지역으로 이주하여 왜인으로 정착하면서 200여년 동안 영산강유역권의 마지막 마한 세력과 교류해 오다가 5세기말경부터 일본열도의 정세 변화 속에서 망명하였다는 것임.


11. 여러가지 학설 가운데

    망명왜인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망명지가 영산강유역권에 국한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다?

• 영산강유역권을 중심으로 장고분들이 축조되는 시기는 야마토에 의해 일본열도가 통합되어 나가는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통합의 운명에 처한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으로 망명하고자 한 왜인들이 많았는데 특히 규슈지역은 한국과 가깝기 때문에 한국으로 망명한 왜인들이 많았음.

• 영산강유역에서는 5세기 4/4분기에서 6세기 1/4분기에 광주 월계동 1호분과 같은 북큐슈식 석실이 사용되다가 6세기 2/4분기에 해남 용두리고분과 같은 히고식 석실로 바뀌는 점이 주목됨.

• 5세기 4/4분기는 큐슈지역에서 구마모토 지역의 이와이(盤井) 세력이 야마토 정권에 대응하기 위해 북큐슈를 병합한 시기였고, 6세기 2/4분기는 이와이 세력이 야마토 정권에 패배한 시기였음.

• 영산강유역권 북큐슈식 석실의 주인공은 5세기 4/4분기에 이와이 세력에게 병합된 북큐슈 지역의 망명객으로 추정되고, 히고식 석실의 주인공은 6세기 2/4분기에 야마토 정권에 병합된 구마모토 지역의 망명객으로 추정됨.

• 이와같은 해석은 일본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음. 일본에서는 5세기 4/4분기에 북큐슈식 석실이 여러지역으로 파급되었는데 그 배경은 북큐슈 지역이 5세기말 이와이 세력에게 병합당하하자 북부 큐슈 세력이 각각 자신들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던 지역으로 망명한 결과임. 이때는 일본열도 여러지역 뿐만 아니라 한국 영남지역으로도 망명하여 북큐슈식 석실을 남기고 있음.

• 그러나 히고식 석실을 사용하고 있었던 이와이 세력은 영산강유역권으로 망명하여 히고식 석실을 남기고 있음.


12. 북규슈식 석실은 영남지역에서도 나타나는데,

    히고식 석실은 영산강유역에만 나타나는데는

    무언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 가장 핵심적인 것은 정치적인 망명이라는 것은 필요한 자의 요청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망명을 요청받은 세력의 승인이 있어야 성립된다는 사실임.

• 북규슈식 석실의 주인공은 구마모토의 이와이에게 쫒겨났기 때문에 규슈만 피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지만 이와이 세력은 야마토 정권에 병합됨으로써 이미 야마토 정권이 장악해 버린 일본열도에서는 더 이상 망명처를 얻기 어려웠음.

• 이와이 세력은 한국에서 안전한 망명처를 구하고자 하였을 것이지만 당시 가야나 신라에서는 망명처를 얻기 어려웠을 것임.

• 이와이 세력의 망명을 요청 받은 입장에서는 일본열도를 통합한 야마토 왕권과의 갈등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임. 이와이 세력과 관련된 히고식 석실들이 영산강유역권에 국한된 것은 백제⋅신라⋅가야와 달리 영산강유역권의 마지막 마한 세력은 야마토 세력과 무관하였기 때문임.


13. 장고분들이 당시 마한 중심지인 나주지역을 제외하고

    외곽지대에 분포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 당시 영산강유역권의 마한 세력을 주도하였던 나주 반남 세력의 입장에서는 일본 망명객을 받아들이되 이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을 것임.

• 이 문제는 장고분의 분포상을 통해 추정할 수 있듯이 외곽지대에 분산 수용함으로써 해결하였던 것인데 그와같은 분산 수용의 전략 속에는 백제와의 경계 지역에서 백제의 남하를 저지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을 것임.


14. 일본식 고분인 장고분들이

    영산강유역에 국한된 이유가 분명해지는데,

    그렇게 본다면 당시 이 지역과 백제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 4가지 학설 가운데 망명왜인설이 가장 설득력을 가졌지만 다른 학설들 모두 당시 영산강유역권이 백제의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점은 같음.

• 그동안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한 마지막 마한 사회가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병합되었다고 하는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이견들이 제기된 바 있음. 기존 견해를 뒷받침하여 주는 문헌기록이 충분하지 않은 반면 장고분을 위시하여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고고학 자료들이 속속 알려지고 있기 때문임.

• 2018년에는 마한연구원에서 중국 양직공도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는데 521년까지 전남지역에 마한 소국들이 존재하였음이 문헌자료로도 인정되었음.


15. 중국 양직공도가 어떤 내용이길래 그토록 중요한지?

• 양직공도는 6세기 전반경 중국 남조의 중심이었던 양나라에 파견된 여러 주변나라들의 사신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라 사정을 글로 정리한 두루마리임.

• 거기에 보면 521년 백제 무령왕이 파견한 사신의 모습과 그 사신이 알려준 당시 백제의 사정이 189자의 글로 정리되어 있음.

• 그 가운데 '백제 주변에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 방소국들이 있어 백제에 부용한다.’는 기사가 있음. 이 9개 방소국 가운데 지미 · 마련 · 하침라는 전남지역 마한 소국으로 추정됨.

• 따라서 양직공도 백제 기사는 521년에 백제에 통합되지 않은 마한 소국들이 전남지역에 존재하였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기록이며, 530년 경 백제에 복속 됐을 것으로 보게 하는 고고학 자료와 상통함.


16. 결국 장고분과 같은 고고자료와

    양직공도와 같은 문헌자료를 통해,

    고대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광주⸳전남지역이

    6세기초까지 독자적인 마한 사회를 이루다가

    530년경에 백제에 병합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된 셈이네요?

• 그렇습니다. 1959년 이병도 박사에 의해 제기되었던 4세기 중엽 광주전남지역 마한 병합설이 학계의 통설이 되어 역사교과서를 통해 교육되었는데 최근 20여년 사이에 이루어진 고고학 조사, 연구와 중국 양직공도를 통해 6세기 중엽설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임.

• 작년에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광주⸳전남지역이 마한역사문화권으로 설정됨으로써 지역 개발의 새로운 동력이 되었는데 이는 이와같은 새로운 조사, 연구 성과가 바탕이 된 것임.


17. 장고분들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 그동안 광주전남지역은 ‘백제문화권’에서 ‘영산강고대문화권’으로 바뀌었다가 ‘마한역사문화권’으로 정착되었음. 이제야 역사적인 뿌리찾기가 외형적으로나마 마무리되었다고 하겠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뿌리찾기, 역사찾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은 제1조에 그 목적이 지역개발에 있다고 명시하고 있음.

• 미래의 지역발전에 있어서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함.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역사문화권 개발사업에 있어서는 국가의 지원을 받게 되지만 각 지차제별로 좋은 사업계획을 세워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함. 따라서 지차체 담당 공무원, 주민, 학계 등 다양한 의견이 수합되고, 정리되어야 좋은 계획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임.

• 학술적으로는 새로운 연구 성과를 역사교과서에 싣고, 광주전남 마한 문화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도록 지역 주민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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